태그 : 비
2009/01/28 때때로 나는 울었다.
2008/07/17 지금 유서遺書를 쓰며.
2008/07/08 글 하나를 쓰기 시작했다.
2008/06/27 La Montre De Voltaire. 볼테르의 시계. [2]


# by | 2009/05/16 22:37 | 글 | 트랙백 | 덧글(6)
# by | 2009/01/28 23:26 | 글 | 트랙백 | 덧글(0)
고백하자면 나는 그 때 죽어가고 있었다
그날따라 해는 쪼아대었고 죽은 나무에는 쉼터조차 없었으며
귀뚜라미도 위안을 주지 않는
아스팔트에서 피어난 하얀 아지랑이만이 기울이는
붉은 바위 그늘 아래에서
우리는 다만 쓸데없는 짓만을 되풀이하며
마치 어쩌면 고사하는 가시나무처럼
차가운 수분을 갈구하지만 그 안에는 아무런 힘이 없는
터덜거리지만 그 속에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결국 지배하는 것은 두통과 일사병, 화농, 열점 뿐이었던
작년 오늘과 같은 날짜에
카르타고로 그때 나는 왔다
불타는 도시와 현실감 없는 광기가 용광로처럼 끓어 넘치는 곳으로
내 발밑에는 실어증 걸린 그림자가 하나쯤은
함께 있었는지도 모르고 그 그림자의 색깔은
푸른 색이었을지도 모르는
너무나 어두워 부르고 싶은 노래를 들녘에 버리고
한밤에 읊을 시를 실삼나무 끝에 걸어버려
더이상 아무런 및을 남겨 놓지 않는 아주 어두운 군청색과
너무나도 어두워 내 발목을
쐐기풀처럼 감아 끌어당기는 그림자가 있었을지도 모르는
그곳에
고백하자면 나는 그때 죽어가고 있었다
작년, 어느 장소로
나는 오늘과 같은 날짜에 왔다
여름은 아주 위대했다
무너져가는 포도에 마지막 달콤함을 달아매었으므로
그러나 나는 포도가 아니어서
우리는 다만 쓸데없는 짓만을 되풀이하며
오가며 미켈란젤로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쓰러져 가는 나무처럼 중얼거린다
그리고 정말 시간은 있겠지
<서두르세요 닫을 시간입니다>
여보세요, 대답해요. 당신은 그곳에 있습니까?
아니오 나는 이곳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누구요?
세어보면 당신은 없고 나 하나뿐인데
내가 이 하얀 길을 바라보면
내 옆엔 언제나 또 한 사람이
밤의 망토를 휘감고 소리 없이 걷고 있어
두건을 쓰고 있어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하여간 내 곁에 있는 제삼자는 누구요?
아 내가 지금 대답을 하고 있습니까?
<서두르세요 닫을 시간입니다>
작년
오늘과 같은 날짜에 우리는 만났다
내 그림자는 당신을 만난 뒤로부터 더 짙어졌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보라, 당신의 눈은 진주로 변했다
당신의 눈 앞에 그걸 바라본 내가 도리어 부끄러워졌다
그래서 나는 이따금 그대를 보고 놀랐지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알지 못하는 까닭은
나와 너의 눈이 늘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었으므로
그래서인지 내가 너를 수사(水死)한 채로 떠올릴 때마다
언제나 그 눈동자를 떠올리곤 했다
그리고 당신의 눈동자를 떠올리는 언제나
나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당신의 눈을 지워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 진주의 샘은 내 심장을 잘라내고 녹이고 베어 갔으므로
그러나 생각은 남았다
이 움켜잡는 뿌리는 무엇이며
이 생각에서 어떤 흐름이 뻗어 나오는지
나는 말하기는커녕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다가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기 때문에
하늘로 날아가는 땅과 바닥으로 떨어지는 땅
그곳에 나를 부르고, 가게 하고, 남게 하는
트럼펫 소리는 검은 빛깔의 고독을 들려준다
그 속을 통해 잠깐 동안의 꿈속에서처럼 우리는 미친다
집들은 우리들 뒤에서 쓰러지고
골목마다 비스듬히 기운다
땅들은 물러서며 우리는 그것을 잡는데
우리들은 말馬들이 빗소리처럼 속삭여댄다
기억하는가 8월의 긴 눈짓을
그대 속에서 돌이 구르고 또 별이 구른다
내 몸에 지닌 모든 것만이
풍요해지고, 내가 되고
나무가 되고
하늘로 날아가는 땅과 하늘로 떨어지는 하늘
——그러나 어쨌든 당신은 떠났다!
안녕, 안녕
안녕, 부인님들, 안녕, 아름다운 부인님들, 안녕, 안녕
숨쉴 때마다 뜨고 지는 별무리
입술로는 이슬 냄새 젖어오고
마지막 잎새의 손가락들이
젖은 둑을 움켜쥐며 가라앉는다
밖의 풍경은 내가 없는 듯 늠름히 사라져간다
별은 지고 있는데
도대체 밤은 어디에서 시작하는가?
그 틈바귀를 통해 당신이 가버린 그곳을 통해
한 줄기 현실이 찢어져버렸다
푸르름, 현실의 푸르름,
현실의 햇빛, 현실의 술
나는 현실과 뒤섞인다
——그런데 도대체 밤은 어디에서 시작하는가?
황혼녘의 시간이 소리죽여 조용한 발걸음으로
저 아래 깊이 지나가고 있다
나는 밤을 믿는다
내 본질의 어두운 시간들,
내 감각이 깊이 묻어 있는 그 시간들
그래, 정말 시간은 있겠지
별이 지고 하늘과 땅이 만나며 어둠이 태어날 시간이
밤은 마침내 왔다, 탑이 원한을 품은 곳에
어둠은 제 몸에 모든 것을 품으며
형상과 불꽃, 짐승과 나, 인간과 권력마저도
욕정과 추억을 뒤섞고
새를 바람과, 인간을 환상과 뒤섞는다
이제 이해되었던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곳에서 나는 너의 눈을 마주본다
그리고 때문에 나는 너의 삶을 볼 수 있었다.
그곳에는 어떤 트럼펫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트럼펫 소리! 여리고의 트럼펫 소리!
슈투카의 급강하 소리!
별무리는 언제나 그 주변의 별을 예고한다
어둠의 장막은 찢어졌다
하얀 것들이 소리 없이 밤을 가로지른다
밤의 종말을 향하여
오래된 상처
강의 마른 입술
자작나무의 흰 껍질
죽음 뒤에 나타나는 흰 터널
외로운 영혼
어린 시절의 기억
물 위에 뜬 빛
하얀 새의 넋
진주의 샘은 사라졌다
그리고 마침내 밤의 죽음이 선고된다;
모든 것은 새벽의 빛깔을 띄고 있다
밤은 마침내 살해되었다 오늘이 왔으므로
오늘은 왔다
지금 이곳엔 물이 없고 다만 바위뿐
바위 있고 물은 없고 모랫길뿐
길은 구불구불 산들 사이로 오르고
산들은 물이 없는 바위산
물이 있다면 발을 멈추고 목을 축일 것을
바위 틈에서는 멈출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다
땀은 마르고 발은 모래 속에 파묻힌다
바위 틈에 물만 있다면
침도 못 뱉는 썩은 이빨의 죽은 산 아가리
여기서는 설 수도 누울 수도 앉을 수도 없다
산 속엔 정적마저 없다
비를 품지 않은 메마른 불모의 천둥이 있을 뿐
산 속엔 고독마저 없다
금간 흙벽집들 문에서
시뻘겋게 성난 얼굴들이 비웃으며 우르렁댈 뿐
바위가 없다면
만일 바위가 있고
물도 있다면
물
샘물
바위 사이에 물웅덩이
다만 물소리라도 있다면
매미 소리도 아니고
마른 풀잎 소리도 아닌
바위 위로 흐르는 물소리가 있다면
티티새가 소나무 숲에서 노래하는 곳
뚝뚝 똑똑 뚝뚝 또르륵 또로록
하지만 물이 없다
오늘 어느 날에
나는 그곳으로 왔다
나를 부르고, 가게 하고, 남게 하는
심지어는 묵시록의 나팔 소리마저 들려오지 않는,
때문에 내 목소리가 그대에겐 잘 들릴 것이다
나라고 해서 좋아서 한 일은 아니었다. 나는 나의 삶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고 그러는 사이에 우리의 운명은 빗나가고 말았다. 이제 나는 너를 부르노라. 우리 사이에 놓여 있던 수많은 세월의 자격으로 너를 부르노라.
샨티 샨티 샨티
***
사실 이 시는 90% 이상이 다른 시에서 따 온 인용문입니다. 인용출처는 나중에 다른 포스트로 하겠습니다.
# by | 2008/07/17 17:35 | 글 | 트랙백(1) | 덧글(0)
《책이 가진 자연스럽고 억누를 수 없는 소명이 있다면, 그것은 널리 퍼져 나가는 것이다. 책은 출판되고 배포되고, 세상에 알려져서, 사람들이 사고, 읽으라고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 유명한 작가의 상아탑은, 실상은 하나의 출병탑(出兵塔)이다. 우리는 언제나 독자에게로, 없어서는 안 될 작가의 협력자에게로 돌아온다. 한 권의 책은 한 명의 저자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수의 저자들을 갖는다. 그것은 그 책을 읽은 사람, 읽는 사람, 읽을 사람들 전체가 창조 행위에 있어서 책을 쓴 사람에게 마땅히 보태어지는 까닭이다. 쓰여졌으나 읽히지 않은 책은 온전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반(半)존재만을 가졌을 뿐이다. 그것은 하나의 잠재성이며, 존재하기 위햐 열심히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알맹이가 없이 텅 빈 불행한 존재이다. 작가는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며, 한 권의 책을 출판할 때 그는 익명의 남녀의 무리 속으로 종이로 만들어진 새떼를, 피에 굶주려 야윈 흡혈조들을 풀어놓는 것이다. 그 새들은 닥치는 대로 독자를 찾아 흩어진다. 한 권의 책이 독자를 덮치면, 그것은 곧 독자의 체온과 꿈들로 부푼다. 그것은 활짝 피어나고, 무르익어, 마침내 자기 자신이 된다.》
<미셸 투르니에, 『흡혈귀의 비상』, p13>
# by | 2008/07/08 18:08 | 잡상 | 트랙백 | 덧글(0)
《구조라는 것이 행위자나 사회부분간의 일정한 행위패턴을 가리키기 때문에, 사회과학내에는 마치 그것이 하나의 법칙, 규칙인 것처럼 ‘구조’와 ‘법칙’이라는 말을 엄밀히 구별하지 않고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 둘은 엄밀히 구별해야 한다. 그것은 법칙이라는 말이 가지는 복잡성 때문이다.
우리가 법칙을 항상 언제나 관철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행위자가 어쩔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여기서부터 구조와 행위의 문제가 시작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사회적 법칙이 관철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어떻게 사회적 행위의 자율성을 주장할 수 있을까? 우리는 양자택일에 직면한 것처럼 보인다. 우선 구조주의자는 행위자는 역사에 어떤 영향도 줄 수 없으며 따라서 사회에는 구조만이 전부라는 사회실재론 또는 방법론적 전체주의를 택하게 될 것이고, 반면 개인주의자는 구조란 이름에 불과하고, 개인을 제거하면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따라서 존재하는 것은 개인들 뿐이라는 사회명목론 또는 방법론적 개인주의를 택하게 된다. 설사 우리가 구조란 개인을 형성시키는 것이고 개인들의 행위가 구조를 형성시키는 것이라고, 듣기 좋게 변증법적인 개념화를 하게 되더라도 불분명한 부분은 분명히 남아 있다. 긴 시간을 두고 보는 것이 아니라, 현재, 즉 통시적으로 볼 때, 직접적으로 서로 마주친 구조(분명히 일정의 자연적 필연성과 법칙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생각되는)와 개인(분명히 나름의 자율성과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고 생각되는)의 관계를 도대체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그러나, 이러한 문제가 제기되는 것은 사회적 법칙의 특성을 잘못 파악하기 때문인 것이다. 사회적 법칙은 자연 법칙도 그러한 것처럼 언제 어느 때나 관철되는 그러한 특성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사회구조, 즉 사회적 상호작용의 패턴으로부터 하나의 법칙을 도출해낼 때 우리는 그것이 현실에서 반드시 관철된다고 볼 수가 없다. 심지어는 그것이 자연과학처럼 선천적 종합명제적 특성을 가진, 즉 필연적이고 내적인 관계로서의 구조일지라도 말이다. 이렇게 볼 때 법칙이란 언제 어디서나 일을 발생시키는 원인이라기 보다는 작용하는 힘일 뿐인 것이다.
더구나 우리는 사회구조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대상이며 그것에 따라서 인간이 그 사회구조의 강압적 힘을 순순히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강압적 힘은 인간이 무엇을 해야 할지 또는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강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 힘을 스스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나름의 판단을 하고 그에 따라 고유하게 행동할 수 있다(해석학적 측면 – 그 힘을 인지하지 못할 수도 있다). 또는 그는 그 힘을 오히려 이용해 자신의 목적에 유리하게 사용할 수 있다. 즉 인간은 그 힘에 여러가지 다른 방식으로 순응하거나, 그것을 이용하거나, 심지어는 저항할 수도 있다.
요약하면, 사회법칙을 이해할 때 그것이 항상 발생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이렇게 발상의 전환을 하게 되면, 우리는 사회구조가 갖는 힘이 작용하는 환경하에서, 행위자가 그 법칙(규칙)을 어떻게 따르고, 어떻게 대응(대항)하고, 어떻게 이용하는지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게 된다(우리는 그것을 행위자의 전략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법칙이란 항상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경향적으로, 그러한 행위들의 결과로서만 나타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에 따라 우리는 사회구조 법칙과 사회현상 일반간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 첫째, 사회적 법칙은 언제나 작용하고 있는 것일 수는 있다. 둘째,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발생하지는 않는다. 셋째, 오히려 그것이 실재하는 세계에서 발현되고 작동되는 것은 언제나 인간에 의해 매개될 때이다. 넷째, 인간은 그 법칙 또는 구조에 따라 기계적으로 움직이는게 아니라 창의적으로 행동하며, 따라서 여러 가지 다른 방식으로 그것에 순응하고, 그것을 이용하며 심지어는 저항(이 경우 그 법칙을 억누르는 다른 법칙을 이용할 수도 있다—이 세계의 구조는 일괴암적인 것이 아니고 거기에는 여러 가지 다른 경쟁적이고 심지어는 상쇄적인 법칙들도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까지 하게 된다(물론 여기에는 행위자가 위치한 맥락과 그가 의존하는 전략적 계산양식의 문화적, 사회적 특수성이 개입된다). 다섯째, 따라서 우리가 ‘하나의’ 사회 법칙 혹은 구조를 이해할 때 그것이 단지 사회적 행위자들의 전략적 행위들의 존재론적, 인식론적인 환경, 장, 기초를 제공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따라서 여기서 이해사회학 혹은 해석학이 개입되어야만 한다 – 물론 이쪽으로 너무 경도되면 모든 구조와 법칙을 무시하는 포스트모던 사회학이 된다). 중요한 것은 법칙 하나 하나가 아니라, 그것들이 (실제 구체적인 행위 수준에서든, 또는 그것을 규율하는 또 다른 법칙 수준에서든) 어떻게 조합되는가를 아는 것이다. 여섯째, 따라서 그러한 법칙이 작용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른 법칙이 더 우위에 있기 때문에) 그러한 법칙이 관철되지 않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동시에 (항상 작용하는 힘으로서의) 사회적 법칙/구조의 존재와, 사회적 행위가 그것으로부터 가지는 자율성(법칙의 작용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러한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 양 작동하는—왜냐하면 그 법칙이 작용은 하지만 발현되지 않기 때문이다) 둘 다를 인정할 수 있게 된다. 이로서 법칙적, 필연적 구조와 자율적 행위의 문제는 해결된다.(pepe)》
결국 pepe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를 간단히 요약해보면, ①구조가 사회과학 내에서 법칙처럼 작용하는 것은 맞지만, ②그 법칙이라는 것이 언제나 작용하는 자연과학적 법칙(ex) F=ma)은 아니며, ③언제나 인간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발현되기 때문에 ④언제나 인간이 법칙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형태가 아니라 언제라도 능동적으로, 심지어는 그 구조에 대해 정반대의 반응을 보이는 형태로까지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볼테르의 시계』 에서의 볼테르와 그외 다른 인물들간의 갈등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 소설이 그리는 대립구도는 어떠한가? 이 소설은 기본적으로, 기존의 사회 구조에 대해 그것을 올바른 것으로 판단하고 수동적으로 그 구조를 따르는 사람들과 그 구조에 대해 새로운 법칙을 제시하며 능동적으로 저항하는 주인공간의 대립을 다루고 있다. 볼테르는 새로운 법칙을 제시하며 기존의 사회를 지배하는 구조에 대해 전면적으로 부정을 하고 있기 때문에(마치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나타난 것처럼) 그는 그를 억압하는 사회(와 기존의 구조를 인정하는 사람들)와 대결한다. 하지만 그는 다른 소설의 주인공과는 달리 진정으로 세계와 대결한다고 할 수 있는데, 허균의『홍길동전』 에서의 홍길동이, 자신을 서출이라 억압하는 사회에 대결하고 있기는 하지만, 스스로가 높은 지위에 오르려고 노력함으로서 기존의 구조에 편입되기 위해 노력하는 점과는 반대로, 볼테르는 처음부터 그 사회에 편입되기를 거부하고 그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구조를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항상 망치가 되고 싶었네, 롱샹. 모루가 아닌 망치 말이야. 그런데 틀렸어. 되어서 무엇 하겠나? 망치가 있다면 모루가 있겠지. 내가 망치가 된다면 모루의 자리에는 또 다른 사람이 들어갈 수밖에 없네. 그게 뭐란 말인가? 모루와 망치가 있다는 것 자체가 틀린 거네. 그런 건 없고, 없어야 마땅해. 내가 그들과 다른 것이 대체 무언가?》
<강다임 作, 볼테르의 시계, 노블레스클럽, 2008, p58-59>
이것이 곧 새로운 세계 구조의 정신이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이러한 망치와 모루의 구분이 사라질 수 있다고 보는가? 여기에서 우리는 계몽사상의 정의 일부를 서양철학사에서 인용할 수 있다.
《계몽 사상(Enlightment)
계몽이란, 아직 미자각상태(未自覺狀態)에서 잠들고 있는 인간에게 이성(理性)의 빛을 던져주고 편견이나 미망(迷妄)에서 빠져나오게 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결국 여기에서의 계몽이란, 미자각상태에 있는 인간을 깨우침을 말한다. 그런데 이 미자각(未自覺)이라는 말은 묘한 함의를 지니고 있다. 그냥 깨우치는 것이 아니라, 아직[未] 자각하지 못한 인간을 깨우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성(理性)은 깨우치는 것이 아니라 깨우침의 수단이라는 것이다. 즉 이 미자각이라는 말은 이러한 구분을 없애는 힘이 인간의 외연(extension)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인간에게 내포(intension)되어 있음을 말한다. 그리고 이 내포된 것, 그것은 곧 절대 이성으로, 이것이 곧 계몽 사상에서의 원리와 원인이 된다.
《원인 탐구의 아래에 깔려 있는 전제는 이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존재들이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밥을 너무 많이 먹은 사건과 배가 아프다 라는 사건이 있습니다. 이 두 개의 사건 사이에 아무런 연관이 없다면, 다시 말해서 두 개의 사건이 서로 완전히 고립된 것으로만 존재한다면, 원인 개념은 필요가 없겠죠. 그런데 두 사건이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 때문에, 즉 배가 아픈 것이 밥을 너무 많이 먹었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할 때, 원인과 결과, 즉 인과(因果)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식의 사고에 깔려 있는 중요한 철학적 전제는 바로 결정론(決定論 =determinism)이에요. 즉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아무런 이유 없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정한 인과 관계에 따라 일어난다는 생각입니다. 원인에 대한 탐구 아래에는 이런 전제가 암묵적으로 깔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정우 저, 개념-뿌리들, 철학아카데미, 2004, p.53>
그리고 이러한 결정론적 사유는 언제나 제일 원인에 대한 탐구로 귀결된다. 원인에게도 또다른 원인이 있고, 또 역시 그 원인의 원인에게도 원인이 있다면, 모든 것의 근본이 되는 원인이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계몽주의는 이 원인을 절대 이성으로서 제시하고 있다. 결국 볼테르는 이러한 절대 이성이 어느 시대에든 제일 원인으로서 존재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시대를 여행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모든 사회의 구조에 대해 선포하는 도전장이며, 동시에 그들 속에 숨겨져 있는 절대 이성을 이끌어 내겠다는 선언이다. 그는 새로운 제일 원인(절대 이성)을 예증해보이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첫 번째 여행과 두 번째 여행에서, 볼테르는 과연 절대 이성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었는가? 그것은 아니다. 그것은 시대마다 행했던 내기의 내용이 절대 이성으로서 해결될 수는 있었겠지만, 동시에 꼭 '절대 이성으로만' 해결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점에 있다. 그것은 교묘한 속임수였다. 볼테르는 마치 내기의 내용이 절대 이성의 존재를 증명해 낼 수 있었던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동시에 그 해결의 방식은 도리어 기존의 관습을 철저히 이용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게르만에서는 신으로의 가장으로서, 로마에서는 변론의 타당성으로서(그러나 그 논거는 어디까지나 그가 부정했던 혈통으로서), 내기를 승리했기 때문에 사실 그것은 진정한 예증이 될 수 없었다. 게다가 두 번째 내기에서는 무력에 철저하게 당해버리고 말았다. 현실 앞에서, 그는 절대 이성을 보이지도 못했으며 기존의 관습만 이용하는 모습만을 보여주었었다. 모든 일에 원인이 존재한다면, 그리고 그 원인이 절대 이성이라면, 어째서 그는 그 절대 이성을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으로서 보이지 못했는가? 철저한 현실주의자인 쉴리 공작은 그 점을 맹렬하게 공격한다.
"어설픈 이상주의는 쓰레기네!"
어째서 그 말을 볼테르는 부정할 수 없었는가? 그것을 부정할 수 없었던 그는 세 번째 여행에서 어떻게 했는가? 그리고 볼테르는 세 번째 여행에서 진정한 원인을 찾는다. 그것은 자신이 절대 이성의 비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부터가 진정한 절대 이성을 보여야만 했다. 결국 그는 세번째 내기에서 스스로 절대 이성으로 사고함으로서 기존의 관습에 의지하지 않고 홀로 가 적군 총대장인 오귀스트와 일대일 격투를 벌인다. 왜냐하면 그와 오귀스트는 똑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와 자신이 다를 이유는 하나도 없기 때문에.
결국 그는 그 내기에서 승리한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 내기를 시작한다.
1725년, 프랑스에서. 기존의 세계 구조를 절대 이성의 힘으로 바꾼다는 내기를 말이다.
그리고 그 내기의 승패는 역사가 말해 주고 있다. 계몽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후기.
사실 나는 계몽주의를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말한 것처럼 이성은 새로운 신화의 다른 이름이라고 생각하며, 아도르노의 말 "계몽은 더 이상 생각하는 것(thinking)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이 계몽의 모순이며 자기 파괴의 결과이다." 라는 말에 심정적으로 동조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여기에서의 계몽주의가 꼭 역사 속의 계몽주의를 가리키는 말은 아니다.) 또한 이런 이성 중심의 탐구가 큰 위험을 불러 올 수 있기 때문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이정우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현대 철학자들은 또 다른 원리를 제공하려 하기보다는 원리에 대한 탐구 자체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볼까요? 여기에는 물론 한두 가지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겠죠. 그러나 일단 우선적인 이유는 아마도 이들이 원리에의 탐구가 모종의 지적 폭력을 함축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일 겁니다. 우주 전체를 지배하는 원리를 탐구한다는 것은 이 세계에 존재하는 다양성, 불연속성, 우연, 개별성 등을 어떤 거대한 틀로 환원시킨다는 것을 뜻합니다. 물론 이런 노력은 순수한 지적 열망에서 시작된 것이지 꼭 폭력은 함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해석은 일종의 과잉 해석이죠. …(중략)…또한 원리의 거부에는 사회-역사적 이유도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중심(주의)'의 거부와 연관됩니다. 중심주의는 세계에 어떤 중심이 있다고 보고 그 중심을 가운데 놓고서 다른 사물들을 이해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중심이 빛이 되면, 다른 존재들, 즉 그 중심의 '타자들'은 그늘 속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현대 사유는 이 그늘 속에 있었던 타자들을 복권시키고자 합니다. 미개인에 대한 레비-스트로스의 사유, 광인에 대한 푸코의 사유, 여성에 대한 페미니즘의 사유, 어린이 등을 비롯한 '소수자'에 대한 들뢰즈와 가타리의 사유 등, 현대 철학의 거장들은 타자들에 대해 공통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중심을 거부하는 사유, '탈중심화(脫中心化)'의 사유입니다. …그런데 전통적으로 '원리'라 불리웠던 것들이 모종의 중심주의를 함축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현대 철학자들이 전통철학의 원리에 대한 탐구를 의구심을 가지고서 바라보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Ibid, p.49>
이런 이유 때문에 계몽주의를 싫어한다. 하지만 이 책은 도무지 싫어할 수가 없다. 솔직히 말해서, 정말 번뜩이는 재치와 품위있는 위트가 결함한 소설이었다. 그리고 곳곳에 숨겨져 있는 유머를 찾아내는 것도 무척 즐거운 경험이었다(『볼테르의 시계』는 '볼테르의 시계' 라는 글로도, 혹은 볼테르의 '시계' 로도 읽힐 수가 있다.) 그리고 그가 글 속에 쏟아부은 노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절로 알 수 있을 만큼 뛰어난 소설이었다. 솔직히 나는 환상문학에서 비대칭 환자방식 암호의 예시를 문제로 볼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열쇠말의 문제에 관련된 예시를 저렇게 써먹다니…정말 유쾌한 경험이었다.
또한 능청스럽게 자신이 골동품점에서 글을 발견했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나에겐 그냥 유쾌했다. 왠지 모르게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과, J.R.R. 톨킨의 반지의 제왕이 떠올라서 말이다. 아직 이것 말고도 찾아내지 못한 것들이 많겠지만 일단은 이런 것들이 스토리 곳곳에 숨겨져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냥 내용만으로도 풍부하게 즐길 수 있는 책이라고 나는 말할 수 있다.
단숨에 읽은 지 꽤 되었지만 아직도 내용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의 자부, 그의 좌절, 그의 깨달음 하나하나가. 그리고 나는 이 책을 읽고 당신도 이런 느낌을 받게 하고 싶다. 그런 욕심이다. 그리고 환상적인 느낌을 받고 싶은 당신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역시 그것 또한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재미를 느끼고 싶은 당신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너무나도 풍부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빠져드는 글을 원하는 당신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그 흡입력을 도무지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당신에게 이 책을 읽히고 싶다. 그런 욕심이다.
by 翰彬.
p.s. 사카이아의 사형수에 대해 서평을 쓰고 싶은데, 책을 구할 수가 없다. ㅠㅠ
p.s. 2. 암호학에 대해 더 흥미가 생긴다면 칸의 코드브레이커를 추천하고 싶다. 이지북에서 나왔다. 너무 가격이 부담된다면 암호의 세계도 좋다. 역시 이지북에서 나왔다.
# by | 2008/06/27 19:29 | 글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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