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빈翰彬's 얼음집

aquavitae.egloos.com

포토로그



절에서의 이틀, 단상. 일상 日常



주말에 친구와 절을 다녀왔다. 조금 힘들지만 공기가 맑아 좋았다. 오랜만에 시원한 공기도 좋았지만 더욱 좋았던 것은 정적이었던 것 같다. 산은 서늘했지만 정적은 좋았다. 숲 중간에 앉을 곳이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을 그랬다. 그러면 조용히 정적을 즐길 수 있었을 것이다.

2
일단 나는 청각에 조금 예민하게 구는 것 같다. 일단 시끄러운 것이 날 너무 피곤하게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매일 mp3 플레이어로 그 소리를 지우려 애쓰는 것일지도 모른다. 수령이 30년 쯤 되어 보이는 잣나무가 늘어선 숲길은 그래서 좋았다. 새소리가 있었지만 오히려 그것이 없었으면 정적이라는 느낌이 없었을 것이다. 새소리는 이미 정적의 일부분이다.

3
사찰에 들어가 불교 교리를 공부했다. 일단 처음 한 것이 묵계수행이다.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음, 침묵은 남이 아니라 자신에게 집중하게 한다. 묵계수행을 하면서 남에게 할 말이 있는데 하지 못하는 것은 이미 수행의 의미를 퇴색시킨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수행은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을 용이하게 하는 것이지 단지 말을 금한다는 것은 아니다. 남에게 말하기보다, 남과 소통하기보다 일단 자기 자신에게 침잠하는 것, 그러니까 주위 환경을 좀 변화시키는 것.

4
또 다른 의미도 있을 것 같다. 말을 할 때에는 신중하게 하자는 것. 한 가지 말을 하기 전에 생각을 하고 천천히 내뱉는 것, 그런데 이건 앞서 말한 것에 비하면 부수적인 의미인 것 같다. 왜냐하면 불교는 만인에게 깨달음을 전하는 것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그것보다는 스스로가 깨달음을 얻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이 글은 그냥 넘버링으로 떠오르는 생각들을 정리한 것이니 대충 읽어주시라.

5
또 다른 의미가 있을까? 생각났다. 말을 하는 건 피곤하다. 소통은 즐겁지만 어쨌든 피곤하다. 학교 생활이 떠오른다. 쉬는 시간에는 친구들과 즐겁게 떠들었지만 막상 수업 시간에는 대단히 피곤했다. 웃음을 즐겁지만 경박하다. 말하는 것은 진력을 소모시킨다. 힘을 빠지게 하고 머리가 어지럽게 한다. 그리고 대화는 항상 머릿속에 남기 마련이다. 

6
사찰에서 절밥을 먹으면서 느낀 것도 있다. 일단 모든 것에 대해 감사하는 것. 예전에 모든 음식은 미식이다, 라는 이글루스 블로거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당연하게 느끼는 것에 대해 '인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7
세속적인 것의 장엄함.

8
<생각의 탄생>의 첫 챕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연해 보이는 것이 순간 생경하게 느껴질 때 솟아나는 창조. 게슈탈트 붕괴랑은 다른 이야기다.

9
나는 불교에 대해 잘 모른다. 일단 불교에서는 모든 것이 공空이라고 가르치는 모양이다. 이 공空은 있음有의 반대로서의 없음無이 아니라 그냥 텅 빈 것이다. <있음>이 없어진 상태가 <없음>이다. 이 <없음>은 처음부터 <있음>을 전제한다. 하지만 <공>은 처음부터 그 반대의 무언가를 전제하지 않는다. 그냥 빈 것이다. 

10
모든 번뇌를 버리고
아무 것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공(空)의 경지에 도달한 자.
해탈한 자의 행동은
하늘을 나는 새처럼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법구경法句經 93>

11
모든 것이 <공> 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붓다의 삼법인이 그 대답이 될 수 있을까? 제행무상, 제법무아, 일체개고. 모든 것은 변한다. 모든 존재에 나라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고통이다. 가 삼법인이다. 모든 것은 변한다. 그렇다면 지금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존재>라는 것은 <고정>이다. 그것이 무언가로 일컬어지는 순간 그것은 그 의미로서 고정된다. 하지만 모든 것이 변화한다면 어떤 <존재>, <본질>이라는 것은 없다.

12
파르메니데스가 생각난다. 플라톤이 했던 파르메니데스에 대한 친부살해.

13
모든 것이 사라진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본질적인 물음이 떠오른다. 모든 것이 사라진다면 우리는 도대체 왜 사는가? 아마 선가에서는 그걸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라고 말하는 듯 하다. 정각자正覺者가 되기 위한 것이 그것이라고 하는 것 같다. 지금까지의 정각은 누가 있는가? 고타마 싯다르타.

14
흘러간다는 것을 인정하면 나를 포함한 많은 것들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노력을 제외하면 결국 무의미하다. 그것이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문구의 뜻인 것 같다. 색色은 공空이다. 즉 세계의 황홀한 빛들은 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아닌 것은 모든 것이다. 모든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깨달음을 얻으면 그것이 곧 세계이기 때문에.

15
그래서 나는 108배를 하면서 자연의 많은 것에 감사하는 것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절이라는 것은 스스로를 낮추려는 움직임이다. 거기까지는 좋다. 누군가를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자연의 한 일부로 낮춤으로써 겸손해지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좋다. 하지만 새의 울음소리, 바람의 시원함, 무지개의 황홀함에 감사하며 절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나한테는 약간 이상하다. 그것들은 모두 색色에 속하는 것 아닌가? 그 모든 것들이 공空함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 깨달음일진데, 왜 초보 불자佛子들에게는 그렇게 말을 하는가? 나는 이 모든 것이 형形에 얽매인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16
우리는 많은 욕망에 시달린다. 무언가를 성취해 인정받고 싶은 욕망,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은 욕망, 살아 남으려는 욕망. 불가에서는 이것을 욕망을 버림으로써 해결하려고 한다. 하지만 나는 그걸 성취함으로써 해결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17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에서 우리의 욕망은 유전자가 자신의 유전자를 다음 세대로 전파시키기 위해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즉 이타적인 행동은 이기적인 알고리듬 안에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무언가를 욕망하는 것도 다 유전자의 작용 때문일까?

18
욕망-쾌락을 충족시키려 애쓰는 것은 꿈을 위해 애쓰는 것과 반대일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간단한 예로 고3 수험생을 생각해 보자. 공부가 너무 하기 싫은 학생은 논다. 그리고 그 사람이 제대로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면 논 다음에 후회를 할 것이다. 이건 자신의 진짜 욕망을 만족시킨 것이 아니다.

19
궁극적으로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선 자신이 우선하는 가치에 의해 행동해야 한다. 학생이 공부하는 것은 그럼 쾌락이 아닌가? 그 수험생이 자신의 시험 성취를 잠시의 게임-유희보다 우선하고 있다면 공부한 다음에 과연 후회할까? 그리고 그걸 자신이 쾌락을 추구하지 않고 금욕생활을 했다고 생각할까?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니다. 그는 분명히 쾌락을 추구했다. 더 큰 쾌락-욕망을. 

20
욕망을 버리는 것은 다른 방향으로의 해결책이다. 그런데 그건 넓은 의미에서 꿈을 추구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지 않을까? 욕망을 버리는 것 자체가 욕망보다 우선순위에 있다면 자신이 버리려고 노력하고, 금욕생활을 하는 것은 그 자신의 쾌락원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일 터이다.

21
108배에서 인상깊었던 것은 성냄과 분노를 버리는 것이었다. 분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두 공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그것이 사라질 것이기 때문에 신경쓰지 않고 마음을 두지 않는다. 어떤 모욕이든 스스로에 대해 집중하고 있으면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성을 내는 것은 공한 것에 분노하는 것이다. 그것은 상대방보다 자신에게 더 피해가 오는 행위이다.

22
이 분노를 버리는 것은 욕망을 버리는 것과 다르게, 꿈을 추구하는 것과 병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욕망을 성취하는 것과 버리는 것 사이에는 모순관계가 성립하지만 분노를 버리는 것은 꿈을 추구하기 위한 하나의 방책으로써 사용될 수 있다. 주위의 짜증나는 것들에 대해 분노를 버리고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이 더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하라.

23
참선에 대해서도 배웠다. 처음에는 반가부좌를 하고, 허리를 곶추세우고 눈을 반개한 채 면벽을 했다. 좋다. 정신을 집중하는 데에는. 참선하면서 1번부터 22번 사이의 생각들을 정리했다. 나는 원래 그렇게 양반다리를 잘하는 편이 아니다. 다리가 잘 내려가지 않아 가부좌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다 살짝 비틀어졌고, 비구니가 지적했고, 생각의 흐름이 흐트러졌다.

24
형形이 중요한가? 참선은 조용히 화두話頭를 움켜잡고 생각을 진행시키기 위한 환경을 만들어주는 도구일 뿐이다. 즉, 생각을 조용히 할 수 있고 수마垂魔에만 빠져들지 않는다면 눕든 앉든 물구나무를 서든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형은 마음을 일으키게 하는 도구이지 형이 마음 앞에 와선 안된다. 무슨 생각을 하든 그것에만 집중하면 된 것 아닌가?

25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같이 간 내 친구는 내 옆에서 반가부좌를 하고 있었는데 감기에 걸려 기침을 하고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처음에 눈을 반개하지 않고 완전히 닫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생각을 하다가도 그 친구가 소리를 내면 거기에 신경이 쏠렸다. 그래서 나는 눈을 떴다.

26
눈을 뜨면 오감이 비로소 확실히 나에게 돌아오는 느낌이 난다. 나는 그래서 오감이 나에게 세계의 정보를 전달하기 때문에 주위의 소리가 들리지 않을 줄 알았다. 하지만 친구가 또다시 침을 삼켰고, 눈을 만개한 상태에서도 나는 그곳으로 신경이 온통 쏠렸다.

27
그제서야 나는 깨달았다. 오감은 중요하지 않다. 내 생각은 내가 보고 듣고 맛보고 맡고 느끼는 와중에도 내 안에 있을 수도 있고 내 바깥에 있을 수도 있다. 즉 아무 데나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제서야 있는 것은 내 생각뿐이고, 오감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28
있는 것이 생각뿐이라면 모든 것이 공空이라는 것도 약간은 다른 측면에서 이해가 간다. 결국 나는 나라는 껍데기가 있을 뿐 그 안은 바깥과 다름이 없다. 내 생각이 존재하는 곳이 내가 존재하는 곳이고 즉 나는 아무 곳에서나 다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 육신의 안과 바깥 모두가 빈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29
결국 존재하는 것은 생각뿐이다. cogito ergo sum?

30
생각만이 존재한다면 내 생각을 나도 아니고, 내 친구가 침 삼키는 소리도 아닌 제 3의 장소로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했고, 다시 생각을 이어갔다. 그러자 주위의 모든 것이 조용해지고, 친구가 침을 삼킬 때에도 약간만 흐트러졌다. 내가 침을 삼키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31
그렇게 다시 생각을 이었다. 그렇다면 이 생각의 끈을 계속해서 가져간다면, 위의 표현대로라면 생각을 계속 제 3의 장소에 놓아 둘 수 있다면 내가 걷고 있든 일하고 있든 음악을 듣고 있든 나는 그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장소에 있다. 밥은 그저 내 육신을 유지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뿐이다.

32
그렇다면 그들이 욕망에 대해 무심한 것도 이해는 간다. 생각을 유지시킬 정도의 욕구가 그들에겐 있다. 식욕, 색욕, 수면욕은 그 것에 생각이 가지 않는 한 필요가 없는 것이다. 

33
하지만 나는 욕망에 무심하지 않고 다시 이 방법을 내가 어떻게 원하는 것을 성취할 수 있게 도와줄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내가 공부할 때 그것에 대해 집중해가면서 생각하자는 이야기다.

34
걸을 때 나는 공부보다는 다른 생각을 많이 한다. 내가 가지고 있지 못한 것들에 대해 생각하거나, 인간관계, 복싱, 뭐 그런 것들을 생각하며 걷는다. 하지만 만약 내가 공부를 생각하며 걷는다면 나는 많은 시간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35
그렇게 보면 이 모든 것이 수행의 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공부하는 것 말이다.

36
산에 올라갔다. 산에 올라가는 것은 다시 내려오는 것을 전제한다. 내려오지 않으면? 산인山人=선仙 이 되는 것이겠지.

37
산에서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리고 다리가 아팠기 때문에 더 힘들었다. 그곳에서는 생각을 진행시키기 못했다. 벤치가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이런저런 생각도 진행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38
사찰에서의 일정이 끝나고 그동안의 이틀을 넘버링으로 정리해 본다. 얻은 것을 정리해 보자; 겸손. 인정, 집중, 분노의 버림.

39
내일부터는 본격적으로 바쁜 일정 시작이다. 

40
플로이드 메이웨더 주니어가 쉐도우 복싱 중에 말한다. Hard work and Dedication. 헌신과 노력에 영광 있으라.

 
 

핑백

  • 한빈翰彬's 얼음집 : 2011년 내 이글루 결산 + 신년축사 2012-01-02 13:30:08 #

    ... 절에서의 이틀, 단상.</a>5위: 음악(1회)|아, 라디오헤드.가장 많이 읽힌 글은 오늘부로 애플까로 변신했... 입니다. 가장 대화가 활발했던 글은 오늘부로 애플까로 변신했음. 입니다. (덧글190개, 트랙백0개, 핑백0개)1위:sonny (12회)</a>2위:BigTrain (11회)</a>3위: 탈퇴한 회원 (10회)</a>4위:클리닝타임 (5회)</a>5위:NB세상 (5회) ... more

덧글

  • 뽀삐 2015/01/31 08:02 # 삭제 답글

    흥미롭네요..근데 욕망을 버리는게 가능할까요?? 방금 국어사전 찾아봤는데 욕망의 정의가 부족을 느껴 무엇을 누리고자 가지거나 탐함 또는 이런 마음이라 나오는데..예를 들어 어떤사람이 칼을 들고 제3자를 위협할때 생을 이어 나가기 위한 욕망?? 에서 자유로울 사람이 있을런지..이것두 어찌보면 욕망아닌가요?? 제가 써놓고 헛소리같긴 하네요 ㅋㅋ 여튼 잘봤습니다
  • 뽀삐 2015/01/31 08:09 # 삭제 답글

    쓰진 글들 봤는데 정말 박학다식한거 같습니다 무슨 일을 하시는지.. 궁금하기도 하구요 ㅎㅎ
  • 잘생긴 루돌프 2018/09/01 05:53 # 답글

    저도 궁금합니다. 대체 어떤일을 하는 분 이신지. 복싱에 관심이 많은 한 대학생이 지난 여름 치뤄졌던 플로이드 대 코너 경기에 대한 분석글을 우연히 찾아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여지껏 복싱 카페나 타 커뮤니티에서 봐 왔던 어줍잖은 게시글들과 차원이 다른 양질의 글에 감탄을 하여 자정부터 지금까지 시간가는 줄 모른 채 글쓴분의 다른 글들도 염탐하다 이 곳 까지 오게되어 주제넘게 댓글을 남깁니다.(심지어 회원가입까지 했습니다.) 프로복싱을 너무나 좋아하는 팬이지만 그동안 이정도로 복싱에 대해 자세하고 깔끔하게 정리된 글은 본 적이 없었기에 신세계를 경험하는듯 한 기분이 듭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편안한 밤 되십시오.
댓글 입력 영역



메모장

메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