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1월 29일
황석영, 『손님』, 이데올로기로서의 종교에 관하여.
황석영의 <손님>, —과연 요한은 십자군의 본질을 알고 있었을까.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non adsumes nomen Domini Dei tui in vanum nec enim habebit insontem Dominus eum qui adsumpserit nomen Domini Dei sui frustra
『Exodus』 20:07
황석영의 <손님>에서 작중 등장인물 중 하나인 요한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지만, 동시에 10명의 사람을 죽인 살인자이다. 내가 여기에서 <하지만>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기독교의 본질이 만유의 법칙을 사랑이라고 믿는 것에 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이 두 얼굴의 합치란 일견 괴상하게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모습을 황석영은 담담하게, 그러나 굿의 형식을 빌어 때로는 격정적으로, 우리 앞에 내보이고 있다. 그리고 그의 소설 안에서 그것은 전혀 괴상하지 않다. 폭력은 종교와 아무런 상관이 없으나, 그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 의해, 그 종교와 신앙의 이름으로, 정치․ 경제 ․사회적 목적을 띠고 표출되는 것이다. 이 때 이 종교는 더 이상 순수한 종교가 아니며, 그때부터 이데올로기가 된다. 황석영의 <손님>은, 1950년대의 전근대적인 기독교를 이데올로기로서 규정하고, 같은 시기에 한국에 나타난 또다른 이데올로기인 마르크시즘을 등장시켜 두 이데올로기의 이항대립을 그리고 있다.
모든 신념을 인정한다는 것은, 그 신념들이 다른 신념들 간의 갈증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점에서 불가능하다. 이항대립에서 양쪽 모두를 인정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두 이데올로기는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누며, 오직 앞으로 나아가 상대를 분쇄하고 베어버리는 것밖에는 하지 못할 뿐이다.
작중에서 요한과 대척점에 있는 인물은 물론 일랑이다. 그는 기독교에 맞서는 마르크시즘의 대변자이며, 부에 맞서는 빈의 화신이며, 요한과 함께 이 담론화된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푸코는 담론이 다른 사람들에게 이러한 신념을 강요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특별한 담론의 규칙들은 단지 어떤 일들이 말되어지는 것을 허락하는 것 뿐만 아니라, 담론의 대상이 되지 못한 것들을 배제시키면서 세계를 바라보는 어떤 방식을 부과하기 때문이다. 데리다 역시 비슷한 점을 지적한다. “이데올로기는 받아들일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자아와 비자아, 의미와 무의미, 이성과 광기, 표면과 심연 사이에 엄격한 경계를 긋기를 좋아한다.” 작중의 담론화된 이데올로기 역시 마찬가지로, 이 이항대립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의 경계로 나누고, 그 이데올로기의 수용자를 통제하기 시작한다. 이제 이데올로기로서의 기독교는 요한의 세계관을 규정한다. 인식하는 주체가 사물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인식하는 우물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러한 모습은 요한이 자신들을 “미가엘 곁의 십자군”으로, 상대를 “사탄”으로 규정할 때 절정에 달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요한의 행동과 이 십자군의 비유는 뚜렷한 유사성을 지닌다. 그것은 십자군 운동이 성지 회복이라는 이데올로기적 목표가 목표가 아닌 구실로써 사용되었다는 점과, 요한의 사탄을 물리치는 기독교적 목표 역시 선전 모토로써 이용될 뿐 마르크시즘을 없애려는 진정한 목적은 마르크시즘이 자신들의 경제적 기반을 밑바닥에서부터 무너트릴 수 있기 때문이라는 점과의 명징한 유사성에서 확실히 드러나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데올로기로서의 기독교는, 본래의 종교적 성격을 잃어버린 채 상대를 적으로 규정하는 데 열을 올린다. 그리고 이러한 타자를 인정하지 않는 이데올로기는 폭력이라는 수단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십자군의 알레고리는 이데올로기로서의 종교의 특성을 보여줌과 동시에 한 층위 도약하여 그러한 이데올로기가 사실 명분에 지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이러한 이항대립의 도식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요한을 살인자로 만드는 이유이며, 본래의 종교적 가치가 무시되는 이유인 것이다.
이제 눈을 돌리고 바깥을 보자. 지하철에 나가보라. 여전히 우리 주변에는 교회에 나오라는 신문지를 주고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또 한 명의 요한이 있다. 종교는 인간이 궁극적인 실재와 연합하여 인간 실존이 지닌 본질적인 상처를 치유하게 될 것을 약속한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이러한 종교 본연의 목적보다는 이데올로기로서 더 많이 존재하고 있는 듯하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정당화하고, “기독교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요한에게 일어난 우물효과는 현재 몇몇 기독교도들의 눈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념을 수단으로 이용한다는 점에서도 마찬가지다. 이권을 챙기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교회들이 위급할 때는 종교를 방패로 들이댄다. 과연 이것이 십자군 전쟁에서처럼 종교를 수단으로 이용한 것과 무엇이 다른지를 곰곰이 따져볼 일이다.
그리고 역시 또 하나. 기독교도라고 무조건 형제처럼 받아들이거나, 기독교도라고 무조건 색안경을 쓰고 바라보는 사람들 모두, 그 사람에 잘 알아보지도 앟고, 무조건 그 사람이 믿는 종교가 무엇인가로 사람을 규정짓는다는 점에 있어서, 1950년대의 사람을 공산당인가, 아닌가로 판단했던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 이들 둘 모두, 그것을 호의적으로 해석하든 악의적으로 해석하든 간에, 기독교를 이미 이데올로기로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에선 같은 사람들이다.

이데올로기는 알튀세르, 담론은 푸코에서 빌어와 분석함/
# by | 2009/01/29 21:39 | 글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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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씨는 기독교인도 아니고, 공산주의를 옹호하는 모습을 보이지요.
공산주의정권인 북한이 정말 기독교인들을 상관하지 않았을까요.
그렇지 않았죠. 공산주의의 종교는 곧, 민족주의 아닙니까.
한쪽에 치우친 글을 가지고, 옳다라고 여기신다면,
작가의 사상을 한번 더 살펴보셔야겠습니다.
그리고 공산주의라는 표현을 할 때의 공산주의가 누구나 아는 공산주의입니까, 아니면 북한식 공산주의입니까? 전자로서의 공산주의를 뜻하는 것이라면 제3 인터내셔널(international)은 민족(nation)을 뛰어넘는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군요. 공산주의는 민족주의와 대척점에 있습니다.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1848)의 마지막 문장이 무엇입니까?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아닙니까? 여기에 과연 민족이라는 개념을 끼워넣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후자로서의 공산주의는 북한식 주체사상이지 맑스의 공산주의가 아니므로 굳이 공산주의라고 칭하기는 그렇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