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1월 17일
산타 클로스에 대한 약간의 보론.
계형이론에서 셀프 트랙백.
마침 크리스마스니 적절한 비유를 들어 볼까요. 우리는 산타클로스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산타클로스라는 하나의 총체성, 혹은 초월적 기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아이들에게는 산타클로스가 있다는 거짓말을 곧잘 하지요. 문제는 예전엔 이것이 거짓말인지 아닌지 몰랐다면, 요새는 이것이 확고한 거짓말임을 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는 이미지화된 산타복장을 하고 선물을 나눠주기도 합니다. 이것은 거짓된 총체성, 거짓된 기의이죠. 그러나 그것을 보고 아이들은 기뻐하고, 사람들은 크리스마스에나마 따뜻한 기분을 느낄 수 있겠지요. 그것이 따뜻한 기분을 넘어서서, 선물을 받은 사람에게 뭔가 긍정적 변화를 일으킬수 있다면 그것은 효용론이 되겠지요.
즉, 더이상 환상소설은 무한자를 끌어내려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철저하게 해체된 이 세계의 진실을 감당하기 어려운 독자들을 위한 '거짓말'이 된것은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위안이고, 도피이며, 회복(일시적일지라도)인 것이지요. 그것이 거짓말이 아니라면, 그것이 진정한 초월적 기의라면, 혹은 기의를 찾기위한 노력이었다면, 그것은 위안이나 도피가 될 수 없지 않을까 말입니다. ^^; 회복이라든가, 위안이라든가 도피라든가 하는 것은 결국 거짓말이기에 가능한 것이지 않을까요.(DR.뱃사공)
***
"과연 아이들이 산타 클로스가 있다는 것을 알 때와 모를 때, 어느 때 더 기뻐하리라고 생각하는가?" 만일, 우리가 산타클로스가 거짓말인 것을 알면서도 산타클로스 복장을 한 사람이 선물을 나눠줄 때 우리가 느끼는 것은 과연 산타클로스의 기의인가 아니면 따뜻한 온정이라는 기의인가? 그것이 정말 거짓된 기의라고 생각하는가?
환상소설이 환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이 기의성을 지닐 수 있다면, 그것은 그것이 표방하는 기의로서가 아니라, 다른 기의로서 존재할 것이다. 왜냐하면 독자들은 이미 그것이 환상이며,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고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기의성은 물론 거짓된 기의가 아니다. 해체론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하나의 기표는 반드시 하나의 기의와 대응되지만은 않으므로* 환상소설은 하나의 거짓된 기표 속에 여러 가지의 기의를 담을 수 있다. (한빈)
***
DR. 뱃사공님께서 약간 나의 말을 이해하기 힘들어하시는 것 같아, 그것은 물론 글을 이상하게 쓴 나의 잘못이므로 약간의 보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첨부한다.
하나의 기표는 하나의 기의와만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수많은 기의와 관계맺는다. 만일, 우리가 산타클로스가 실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산타클로스가 선물을 나누어 주는 행위에서 행복감을 느낀다면, 그것은 산타클로스가 나타내는 기의가 거짓말이어서가 아니라 산타클로스라는 기표가 이웃의 따뜻한 온정이라는 기의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우리가 그로부터 회복recovery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것이 거짓된 기의와 관계맺고 있어서가 아닌 다른 기의와 관계맺고 있어서라는 것이다.
환상문학이 그리하여 어떤 <회복>을 가질 수 있다면, 즉 독자에게 <효용론적>일 수 있다면, 그것은 그것이 <거짓말>이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비록 거짓된 기표를 표상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면서도, 그것의 서사narrative 그 자체는 분명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기의에 닿아 있는 것이며, 그것은 소설의 본질일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환상문학이 독자의 효용론적인 측면에 있어 다른 소설보다 더욱 특수성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p.s. 사실 나는 더욱 더 환상문학은 효용론적인 측면을 가지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유희론적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모를까. 그도 아니면 환상문학이 주제의식을 담아내는 것은 무척 힘들기 때문이다. 이는 나중에 <드래곤 라자>와 <하얀늑대들>을 비교하면서 논해볼 생각이다.
마침 크리스마스니 적절한 비유를 들어 볼까요. 우리는 산타클로스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산타클로스라는 하나의 총체성, 혹은 초월적 기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아이들에게는 산타클로스가 있다는 거짓말을 곧잘 하지요. 문제는 예전엔 이것이 거짓말인지 아닌지 몰랐다면, 요새는 이것이 확고한 거짓말임을 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는 이미지화된 산타복장을 하고 선물을 나눠주기도 합니다. 이것은 거짓된 총체성, 거짓된 기의이죠. 그러나 그것을 보고 아이들은 기뻐하고, 사람들은 크리스마스에나마 따뜻한 기분을 느낄 수 있겠지요. 그것이 따뜻한 기분을 넘어서서, 선물을 받은 사람에게 뭔가 긍정적 변화를 일으킬수 있다면 그것은 효용론이 되겠지요.
즉, 더이상 환상소설은 무한자를 끌어내려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철저하게 해체된 이 세계의 진실을 감당하기 어려운 독자들을 위한 '거짓말'이 된것은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위안이고, 도피이며, 회복(일시적일지라도)인 것이지요. 그것이 거짓말이 아니라면, 그것이 진정한 초월적 기의라면, 혹은 기의를 찾기위한 노력이었다면, 그것은 위안이나 도피가 될 수 없지 않을까 말입니다. ^^; 회복이라든가, 위안이라든가 도피라든가 하는 것은 결국 거짓말이기에 가능한 것이지 않을까요.(DR.뱃사공)
***
"과연 아이들이 산타 클로스가 있다는 것을 알 때와 모를 때, 어느 때 더 기뻐하리라고 생각하는가?" 만일, 우리가 산타클로스가 거짓말인 것을 알면서도 산타클로스 복장을 한 사람이 선물을 나눠줄 때 우리가 느끼는 것은 과연 산타클로스의 기의인가 아니면 따뜻한 온정이라는 기의인가? 그것이 정말 거짓된 기의라고 생각하는가?
환상소설이 환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이 기의성을 지닐 수 있다면, 그것은 그것이 표방하는 기의로서가 아니라, 다른 기의로서 존재할 것이다. 왜냐하면 독자들은 이미 그것이 환상이며,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고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기의성은 물론 거짓된 기의가 아니다. 해체론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하나의 기표는 반드시 하나의 기의와 대응되지만은 않으므로* 환상소설은 하나의 거짓된 기표 속에 여러 가지의 기의를 담을 수 있다. (한빈)
***
DR. 뱃사공님께서 약간 나의 말을 이해하기 힘들어하시는 것 같아, 그것은 물론 글을 이상하게 쓴 나의 잘못이므로 약간의 보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첨부한다.
하나의 기표는 하나의 기의와만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수많은 기의와 관계맺는다. 만일, 우리가 산타클로스가 실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산타클로스가 선물을 나누어 주는 행위에서 행복감을 느낀다면, 그것은 산타클로스가 나타내는 기의가 거짓말이어서가 아니라 산타클로스라는 기표가 이웃의 따뜻한 온정이라는 기의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우리가 그로부터 회복recovery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것이 거짓된 기의와 관계맺고 있어서가 아닌 다른 기의와 관계맺고 있어서라는 것이다.
환상문학이 그리하여 어떤 <회복>을 가질 수 있다면, 즉 독자에게 <효용론적>일 수 있다면, 그것은 그것이 <거짓말>이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비록 거짓된 기표를 표상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면서도, 그것의 서사narrative 그 자체는 분명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기의에 닿아 있는 것이며, 그것은 소설의 본질일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환상문학이 독자의 효용론적인 측면에 있어 다른 소설보다 더욱 특수성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p.s. 사실 나는 더욱 더 환상문학은 효용론적인 측면을 가지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유희론적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모를까. 그도 아니면 환상문학이 주제의식을 담아내는 것은 무척 힘들기 때문이다. 이는 나중에 <드래곤 라자>와 <하얀늑대들>을 비교하면서 논해볼 생각이다.
이 글과 관련있는 글을 자동검색한 결과입니다 [?]
- 산타 클로스 by Klimpt
- 크리스마스 하면 산타? by MayStorm
- 크리스마스의 에피소드들 by Layner
- 산타클로스 자서전 - 마리오와 소닉에 감추어진 진실은... by White
- 산타클로스의 마지막 방문. by lovepool
# by | 2009/01/17 22:21 | 글 | 트랙백 | 덧글(3)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여하튼, 나올 글을 보고나서 조금더 주절거려보겠습니다. 기대기대!
제가 얼음나무 숲을 몇 번 봤을 것 같아요? 아니면 라크리모사를, 혹은 현서님의 글을 몇 번 봤을 것 같습니까? 대사가 외워질 때까지 봤습니다. 제가 그렇게 본 글에 대해선 꼭 글을 써요. 그런데 그렇지 않은 건 못 쓰겠어요.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