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2월 27일
계형이론
캐슬 비블리오에도 올린 글 현서의 '한국 환상소설의 긍정적 미래에 대하여'에 대한 철학적 비판에 달린 코멘트에 답하여
***
<그런데 읽다가 보니 의문이 들더군요. 요컨대 한빈님의 요지는
"일단 초월적 기의를 취함으로서 효과를 얻는 환상문학이 초월적 기의를 부정하는 포스트구조주의 시대에 와서 드디어 가치를 얻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지지 않겠는가?"
이 한 문장에 집약되어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환상문학이 추구하는 (조금 더 정확히 이야기 하자면 "장르판타지"라는 개념이 더 명확하겠군요. 보르헤스등은 껴넣기 어려우니까요.) 초월적 기의의 획득이, 과연 낭만주의가 팽배했던 그 시절의 것과 완전히 동일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드는 군요. 현서씨가 환상문학의 원류를 낭만주의라고 말했다는 것은 그 시절의 것과 현재의 것이 기본적인 바탕 위에서 비슷하거나 동일하다는 의미일 것입니다만. 그 시절에 획득하려 했던 총체성과 현재의 장르판타지들이 획득하려 하는 총체성이 과연 동일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입니다.
또한 현대인들이 총체성을 잃어버린 까닭이, 그러한 총체성에 대한 철학적, 정신적인 거부에 의해서 일어난 일이라면, 그러한 초월적 기의에 대한 상실감에 대한 회복으로써 쓰이는 [왜곡된] 총체성이 바로 판타지가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중요한것은, 현재의 장르판타지가 과연 낭만주의적 모티브를 가지고 쓰여지고 있는 것이냐 하는 겁니다.
마침 크리스마스니 적절한 비유를 들어 볼까요. 우리는 산타클로스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산타클로스라는 하나의 총체성, 혹은 초월적 기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아이들에게는 산타클로스가 있다는 거짓말을 곧잘 하지요. 문제는 예전엔 이것이 거짓말인지 아닌지 몰랐다면, 요새는 이것이 확고한 거짓말임을 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는 이미지화된 산타복장을 하고 선물을 나눠주기도 합니다. 이것은 거짓된 총체성, 거짓된 기의이죠. 그러나 그것을 보고 아이들은 기뻐하고, 사람들은 크리스마스에나마 따뜻한 기분을 느낄 수 있겠지요. 그것이 따뜻한 기분을 넘어서서, 선물을 받은 사람에게 뭔가 긍정적 변화를 일으킬수 있다면 그것은 효용론이 되겠지요.
즉, 더이상 환상소설은 무한자를 끌어내려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철저하게 해체된 이 세계의 진실을 감당하기 어려운 독자들을 위한 '거짓말'이 된것은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위안이고, 도피이며, 회복(일시적일지라도)인 것이지요. 그것이 거짓말이 아니라면, 그것이 진정한 초월적 기의라면, 혹은 기의를 찾기위한 노력이었다면, 그것은 위안이나 도피가 될 수 없지 않을까 말입니다. ^^; 회복이라든가, 위안이라든가 도피라든가 하는 것은 결국 거짓말이기에 가능한 것이지 않을까요.(DR.뱃사공)>
***
<현서씨가 환상문학의 원류를 낭만주의라고 말했다는 것은 그 시절의 것과 현재의 것이 기본적인 바탕 위에서 비슷하거나 동일하다는 의미일 것입니다만. 그 시절에 획득하려 했던 총체성과 현재의 장르판타지들이 획득하려 하는 총체성이 과연 동일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입니다.(DR.뱃사공)>
이 표현에 대해 처음엔 환상문학의 원류가 낭만주의라고 했던 분은 현서씨이니 현서씨에게 물어보시지요, 라고 답하려 했는데, 나중에야 이 글이 내 주장에 대한 비판임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비판하는 총체성이 낭만주의가 획득하고자 하는 총체성과 꼭 같다고 말할 수 있는가를 지금 뱃사공님은 묻고 계시는 것 같다.
여기에 대해 나는 논리학의 개념 몇 가지를 원용하고자 한다.
논리학의 개념 중에 배중률(Law of the excluded middle)이란 것이 있다. 영어를 보면 아시겠지만, '중간은 없다' 라는 것이다. 즉, p는 참이거나 거짓이므로, p나, ~p 중 둘 중 하나는 언제나 참이다. 한마디로, '1+1=3'이 거짓이라면, '1+1=3이 아니다'는 참이다.
고전논리학에서 배중률은 언제나 성립한다. 하지만 현대논리학에서는 배중률이 항상 성립한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예컨대 "현재 프랑스의 왕은 대머리이다" 라는 명제는 배중률이 성립하지 않는다. 즉 '현재 프랑스의 왕은 대머리이다' 나, '현재 프랑스의 왕은 대머리가 아니다' 는 '현재 프랑스의 왕' 이라는 존재가 없기 때문에 모두 거짓이다.
때문에 B.러셀은 이러한 모순을 계층을 분리함으로써 해결하고자 하였다. 논리층위를 분할해 배중률을 적용하자는 것으로, "현재 프랑스의 왕은 대머리이다" 라는 명제는 기호논리학의 언어로 이렇게 표현된다. "(Ex)Kx.Bx.(y)[Ky→(x=y)]" 이렇게 이 문장의 논리적 형식은 극명하게 드러난다.
기호논리학의 언어로 이렇게 층위를 분리함으로써, 러셀은 "현재 프랑스의 왕이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를 묻는 층위와, "그 x가 단 하나이며 왕이고 프랑스에 산다면 그 x는 대머리인가"를 묻는 층위로 문장을 환원시킨 후에, 상위 층위부터 배중률을 적용시켜 나간다. 이런 방법을 통하여, 러셀은 이러한 복합 질문을 다루는 유용한 방법을 가지게 된다.
내가 보기엔 뱃사공님의 질문은 이러한 논리 층위를 오해한 데에서 생긴 것 같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문제삼고 있는 것은 그러한 주체가 있느냐 없느냐이다. 즉, 어떤 '중심' 이 존재하면, 필연적으로 중심에 소외된 자들이 생기기 때문에 아예 그러한 '중심' 혹은 초월적 실체가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문제삼고 있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이다. "프랑스 왕"의 비유로 보자면, 지금 "현재 프랑스의 왕이 존재하느냐 혹은 존재하지 않느냐" 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뱃사공님은 낭만주의가 획득하고자 하는 총체성과 포스트모더니즘이 비판하고자 하는 총체성이 다를 수도 있지 않느냐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니까, "현재 프랑스 왕은 대머리인 것이 아니라 콧수염이 있지 않을까요" 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이 문제삼고 있는 대상은 낭만주의가 취하는 총체성 그 자체가 아니라, 총체성이라는 것을 가정하는 모든 행위 자체다. 데리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오직 말의 힘만이 아버지를 보유할 수 있다. 그 아버지는 모든 살아 있는 존재에 대한 아버지이며, 항상 살아 있는 존재에 대한 아버지이다. 다른 말로 설명하면, 우리로 하여금 부성과 같은 어떤 것을 지각하고 탐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정확하게 로고스(logos)이다." 데리다가 여기에서 로고스를 비판하는 이유는 말중심주의를 비판하기 위해서임과 동시에 그런 '말' 을 만듦으로써 우리 머릿속에 상정하는 이데아적인 개념을 비판하는 것이다. 프랑스 왕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은, 그 프랑스 왕에 대해 이미 가정한 낭만주의를 때문에 비판하는 것이다.
***
<또한 현대인들이 총체성을 잃어버린 까닭이, 그러한 총체성에 대한 철학적, 정신적인 거부에 의해서 일어난 일이라면, 그러한 초월적 기의에 대한 상실감에 대한 회복으로써 쓰이는 [왜곡된] 총체성이 바로 판타지가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중요한것은, 현재의 장르판타지가 과연 낭만주의적 모티브를 가지고 쓰여지고 있는 것이냐 하는 겁니다.
마침 크리스마스니 적절한 비유를 들어 볼까요. 우리는 산타클로스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산타클로스라는 하나의 총체성, 혹은 초월적 기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아이들에게는 산타클로스가 있다는 거짓말을 곧잘 하지요. 문제는 예전엔 이것이 거짓말인지 아닌지 몰랐다면, 요새는 이것이 확고한 거짓말임을 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는 이미지화된 산타복장을 하고 선물을 나눠주기도 합니다. 이것은 거짓된 총체성, 거짓된 기의이죠. 그러나 그것을 보고 아이들은 기뻐하고, 사람들은 크리스마스에나마 따뜻한 기분을 느낄 수 있겠지요. 그것이 따뜻한 기분을 넘어서서, 선물을 받은 사람에게 뭔가 긍정적 변화를 일으킬수 있다면 그것은 효용론이 되겠지요.
즉, 더이상 환상소설은 무한자를 끌어내려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철저하게 해체된 이 세계의 진실을 감당하기 어려운 독자들을 위한 '거짓말'이 된것은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위안이고, 도피이며, 회복(일시적일지라도)인 것이지요. 그것이 거짓말이 아니라면, 그것이 진정한 초월적 기의라면, 혹은 기의를 찾기위한 노력이었다면, 그것은 위안이나 도피가 될 수 없지 않을까 말입니다. ^^; 회복이라든가, 위안이라든가 도피라든가 하는 것은 결국 거짓말이기에 가능한 것이지 않을까요.(DR.뱃사공)>
있다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태도가 왜 그것에서 왜 상실감을 느껴야 하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다만, 무언가 초월적 기의가 있을 것이라 가정하고, 현재 그것이 부재하는 것에서 상실감을 느끼고 그것을 추구하는 태도는 총체성에 대한 철학적이고 정신적인 거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장르판타지가 과연 낭만주의적 모티프를 가지고 쓰여지는지는 내가 답할 문제가 아니다. 처음에 그것을 주장하신 분은 바로 현서씨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을뿐더러, 일단 초월적 기의에 대해, 과연 현재의 장르문학이 어떤 문제의식을 가지고는 있는지부터가 의심스럽다.
산타클로스의 비유에 대햐여 한 가지만 묻겠다. "과연 아이들이 산타 클로스가 있다는 것을 알 때와 모를 때, 어느 때 더 기뻐하리라고 생각하는가?" 만일, 우리가 산타클로스가 거짓말인 것을 알면서도 산타클로스 복장을 한 사람이 선물을 나눠줄 때 우리가 느끼는 것은 과연 산타클로스의 기의인가 아니면 따뜻한 온정이라는 기의인가? 그것이 정말 거짓된 기의라고 생각하는가?
환상소설이 환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이 기의성을 지닐 수 있다면, 그것은 그것이 표방하는 기의로서가 아니라, 다른 기의로서 존재할 것이다. 왜냐하면 독자들은 이미 그것이 환상이며,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고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기의성은 물론 거짓된 기의가 아니다. 해체론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하나의 기표는 반드시 하나의 기의와 대응되지만은 않으므로* 환상소설은 하나의 거짓된 기표 속에 여러 가지의 기의를 담을 수 있다.
***
*데리다는 하나의 기호가 다른 기호와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생성하긴 하지만, 이러한 작용은 무한히 계속된다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기호가 다른 기호와 구별됨으로써 의미를 지닌다는 소쉬르의 주장은 모순이다. 그래서 구조주의가 의미의 현존을 믿는 반면, 해체주의는 의미가 기호 안에 현존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의미는 기호에 고정될 수 없고, 존재할 수도 없다. 하나의 기표는 여러 개의 기의를 지닌다. 그 기의는 다시 여러 개의 기표들로 구성된다. 이 기표의 기의는 다시 그것의 기호를 찾음으로써 구성되기 때문에 이 과정은 무한히 반복된다. 즉, 기호는 그 대상을 현존으로 나타낼 수 없으며 현전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현존의 대체물에 불과하다. 기호가 나타나는 순간부터, 즉 시작에서부터, 순수한 실체, 단일어, 특이성을 만날 기회는 결코 없다. 기호는 다른 기호와의 관계와 차이에 의해 의미를 지니며 이러한 의미의 생성작용이 무한히 반복되기 때문에 의미는 기호에 내재하지 않는다. 의미는 이러한 과정 속에 흩어져 있을 뿐이다. 때문에 이러한 의미를 추적하는 순간에 계속해서 그 의미가 연기된다는 것이 데리다의 차연이다.
***
지금 궁금한 건 도대체 뱃사공님이 왜 산타클로스가 '초월적 기의'라고 했을까 하는 점... 산타클로스가 절대적인 의미, 진리, 중심이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닐테고...
현서씨의 코멘트에 대해선 조금 시간을 주시길. 일단 뱃사공님의 의견부터 답하겠습니다.

사진 자체는 슈타인호프님 블로그(http://nestofpnix.egloos.com)에서 작년쯤 업어왔는데, 미리 허락을 받지 못해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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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읽다가 보니 의문이 들더군요. 요컨대 한빈님의 요지는
"일단 초월적 기의를 취함으로서 효과를 얻는 환상문학이 초월적 기의를 부정하는 포스트구조주의 시대에 와서 드디어 가치를 얻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지지 않겠는가?"
이 한 문장에 집약되어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환상문학이 추구하는 (조금 더 정확히 이야기 하자면 "장르판타지"라는 개념이 더 명확하겠군요. 보르헤스등은 껴넣기 어려우니까요.) 초월적 기의의 획득이, 과연 낭만주의가 팽배했던 그 시절의 것과 완전히 동일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드는 군요. 현서씨가 환상문학의 원류를 낭만주의라고 말했다는 것은 그 시절의 것과 현재의 것이 기본적인 바탕 위에서 비슷하거나 동일하다는 의미일 것입니다만. 그 시절에 획득하려 했던 총체성과 현재의 장르판타지들이 획득하려 하는 총체성이 과연 동일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입니다.
또한 현대인들이 총체성을 잃어버린 까닭이, 그러한 총체성에 대한 철학적, 정신적인 거부에 의해서 일어난 일이라면, 그러한 초월적 기의에 대한 상실감에 대한 회복으로써 쓰이는 [왜곡된] 총체성이 바로 판타지가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중요한것은, 현재의 장르판타지가 과연 낭만주의적 모티브를 가지고 쓰여지고 있는 것이냐 하는 겁니다.
마침 크리스마스니 적절한 비유를 들어 볼까요. 우리는 산타클로스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산타클로스라는 하나의 총체성, 혹은 초월적 기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아이들에게는 산타클로스가 있다는 거짓말을 곧잘 하지요. 문제는 예전엔 이것이 거짓말인지 아닌지 몰랐다면, 요새는 이것이 확고한 거짓말임을 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는 이미지화된 산타복장을 하고 선물을 나눠주기도 합니다. 이것은 거짓된 총체성, 거짓된 기의이죠. 그러나 그것을 보고 아이들은 기뻐하고, 사람들은 크리스마스에나마 따뜻한 기분을 느낄 수 있겠지요. 그것이 따뜻한 기분을 넘어서서, 선물을 받은 사람에게 뭔가 긍정적 변화를 일으킬수 있다면 그것은 효용론이 되겠지요.
즉, 더이상 환상소설은 무한자를 끌어내려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철저하게 해체된 이 세계의 진실을 감당하기 어려운 독자들을 위한 '거짓말'이 된것은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위안이고, 도피이며, 회복(일시적일지라도)인 것이지요. 그것이 거짓말이 아니라면, 그것이 진정한 초월적 기의라면, 혹은 기의를 찾기위한 노력이었다면, 그것은 위안이나 도피가 될 수 없지 않을까 말입니다. ^^; 회복이라든가, 위안이라든가 도피라든가 하는 것은 결국 거짓말이기에 가능한 것이지 않을까요.(DR.뱃사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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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서씨가 환상문학의 원류를 낭만주의라고 말했다는 것은 그 시절의 것과 현재의 것이 기본적인 바탕 위에서 비슷하거나 동일하다는 의미일 것입니다만. 그 시절에 획득하려 했던 총체성과 현재의 장르판타지들이 획득하려 하는 총체성이 과연 동일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입니다.(DR.뱃사공)>
이 표현에 대해 처음엔 환상문학의 원류가 낭만주의라고 했던 분은 현서씨이니 현서씨에게 물어보시지요, 라고 답하려 했는데, 나중에야 이 글이 내 주장에 대한 비판임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비판하는 총체성이 낭만주의가 획득하고자 하는 총체성과 꼭 같다고 말할 수 있는가를 지금 뱃사공님은 묻고 계시는 것 같다.
여기에 대해 나는 논리학의 개념 몇 가지를 원용하고자 한다.
논리학의 개념 중에 배중률(Law of the excluded middle)이란 것이 있다. 영어를 보면 아시겠지만, '중간은 없다' 라는 것이다. 즉, p는 참이거나 거짓이므로, p나, ~p 중 둘 중 하나는 언제나 참이다. 한마디로, '1+1=3'이 거짓이라면, '1+1=3이 아니다'는 참이다.
고전논리학에서 배중률은 언제나 성립한다. 하지만 현대논리학에서는 배중률이 항상 성립한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예컨대 "현재 프랑스의 왕은 대머리이다" 라는 명제는 배중률이 성립하지 않는다. 즉 '현재 프랑스의 왕은 대머리이다' 나, '현재 프랑스의 왕은 대머리가 아니다' 는 '현재 프랑스의 왕' 이라는 존재가 없기 때문에 모두 거짓이다.
때문에 B.러셀은 이러한 모순을 계층을 분리함으로써 해결하고자 하였다. 논리층위를 분할해 배중률을 적용하자는 것으로, "현재 프랑스의 왕은 대머리이다" 라는 명제는 기호논리학의 언어로 이렇게 표현된다. "(Ex)Kx.Bx.(y)[Ky→(x=y)]" 이렇게 이 문장의 논리적 형식은 극명하게 드러난다.
기호논리학의 언어로 이렇게 층위를 분리함으로써, 러셀은 "현재 프랑스의 왕이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를 묻는 층위와, "그 x가 단 하나이며 왕이고 프랑스에 산다면 그 x는 대머리인가"를 묻는 층위로 문장을 환원시킨 후에, 상위 층위부터 배중률을 적용시켜 나간다. 이런 방법을 통하여, 러셀은 이러한 복합 질문을 다루는 유용한 방법을 가지게 된다.
내가 보기엔 뱃사공님의 질문은 이러한 논리 층위를 오해한 데에서 생긴 것 같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문제삼고 있는 것은 그러한 주체가 있느냐 없느냐이다. 즉, 어떤 '중심' 이 존재하면, 필연적으로 중심에 소외된 자들이 생기기 때문에 아예 그러한 '중심' 혹은 초월적 실체가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문제삼고 있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이다. "프랑스 왕"의 비유로 보자면, 지금 "현재 프랑스의 왕이 존재하느냐 혹은 존재하지 않느냐" 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뱃사공님은 낭만주의가 획득하고자 하는 총체성과 포스트모더니즘이 비판하고자 하는 총체성이 다를 수도 있지 않느냐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니까, "현재 프랑스 왕은 대머리인 것이 아니라 콧수염이 있지 않을까요" 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이 문제삼고 있는 대상은 낭만주의가 취하는 총체성 그 자체가 아니라, 총체성이라는 것을 가정하는 모든 행위 자체다. 데리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오직 말의 힘만이 아버지를 보유할 수 있다. 그 아버지는 모든 살아 있는 존재에 대한 아버지이며, 항상 살아 있는 존재에 대한 아버지이다. 다른 말로 설명하면, 우리로 하여금 부성과 같은 어떤 것을 지각하고 탐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정확하게 로고스(logos)이다." 데리다가 여기에서 로고스를 비판하는 이유는 말중심주의를 비판하기 위해서임과 동시에 그런 '말' 을 만듦으로써 우리 머릿속에 상정하는 이데아적인 개념을 비판하는 것이다. 프랑스 왕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은, 그 프랑스 왕에 대해 이미 가정한 낭만주의를 때문에 비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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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현대인들이 총체성을 잃어버린 까닭이, 그러한 총체성에 대한 철학적, 정신적인 거부에 의해서 일어난 일이라면, 그러한 초월적 기의에 대한 상실감에 대한 회복으로써 쓰이는 [왜곡된] 총체성이 바로 판타지가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중요한것은, 현재의 장르판타지가 과연 낭만주의적 모티브를 가지고 쓰여지고 있는 것이냐 하는 겁니다.
마침 크리스마스니 적절한 비유를 들어 볼까요. 우리는 산타클로스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산타클로스라는 하나의 총체성, 혹은 초월적 기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아이들에게는 산타클로스가 있다는 거짓말을 곧잘 하지요. 문제는 예전엔 이것이 거짓말인지 아닌지 몰랐다면, 요새는 이것이 확고한 거짓말임을 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는 이미지화된 산타복장을 하고 선물을 나눠주기도 합니다. 이것은 거짓된 총체성, 거짓된 기의이죠. 그러나 그것을 보고 아이들은 기뻐하고, 사람들은 크리스마스에나마 따뜻한 기분을 느낄 수 있겠지요. 그것이 따뜻한 기분을 넘어서서, 선물을 받은 사람에게 뭔가 긍정적 변화를 일으킬수 있다면 그것은 효용론이 되겠지요.
즉, 더이상 환상소설은 무한자를 끌어내려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철저하게 해체된 이 세계의 진실을 감당하기 어려운 독자들을 위한 '거짓말'이 된것은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위안이고, 도피이며, 회복(일시적일지라도)인 것이지요. 그것이 거짓말이 아니라면, 그것이 진정한 초월적 기의라면, 혹은 기의를 찾기위한 노력이었다면, 그것은 위안이나 도피가 될 수 없지 않을까 말입니다. ^^; 회복이라든가, 위안이라든가 도피라든가 하는 것은 결국 거짓말이기에 가능한 것이지 않을까요.(DR.뱃사공)>
있다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태도가 왜 그것에서 왜 상실감을 느껴야 하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다만, 무언가 초월적 기의가 있을 것이라 가정하고, 현재 그것이 부재하는 것에서 상실감을 느끼고 그것을 추구하는 태도는 총체성에 대한 철학적이고 정신적인 거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장르판타지가 과연 낭만주의적 모티프를 가지고 쓰여지는지는 내가 답할 문제가 아니다. 처음에 그것을 주장하신 분은 바로 현서씨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을뿐더러, 일단 초월적 기의에 대해, 과연 현재의 장르문학이 어떤 문제의식을 가지고는 있는지부터가 의심스럽다.
산타클로스의 비유에 대햐여 한 가지만 묻겠다. "과연 아이들이 산타 클로스가 있다는 것을 알 때와 모를 때, 어느 때 더 기뻐하리라고 생각하는가?" 만일, 우리가 산타클로스가 거짓말인 것을 알면서도 산타클로스 복장을 한 사람이 선물을 나눠줄 때 우리가 느끼는 것은 과연 산타클로스의 기의인가 아니면 따뜻한 온정이라는 기의인가? 그것이 정말 거짓된 기의라고 생각하는가?
환상소설이 환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이 기의성을 지닐 수 있다면, 그것은 그것이 표방하는 기의로서가 아니라, 다른 기의로서 존재할 것이다. 왜냐하면 독자들은 이미 그것이 환상이며,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고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기의성은 물론 거짓된 기의가 아니다. 해체론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하나의 기표는 반드시 하나의 기의와 대응되지만은 않으므로* 환상소설은 하나의 거짓된 기표 속에 여러 가지의 기의를 담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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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는 하나의 기호가 다른 기호와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생성하긴 하지만, 이러한 작용은 무한히 계속된다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기호가 다른 기호와 구별됨으로써 의미를 지닌다는 소쉬르의 주장은 모순이다. 그래서 구조주의가 의미의 현존을 믿는 반면, 해체주의는 의미가 기호 안에 현존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의미는 기호에 고정될 수 없고, 존재할 수도 없다. 하나의 기표는 여러 개의 기의를 지닌다. 그 기의는 다시 여러 개의 기표들로 구성된다. 이 기표의 기의는 다시 그것의 기호를 찾음으로써 구성되기 때문에 이 과정은 무한히 반복된다. 즉, 기호는 그 대상을 현존으로 나타낼 수 없으며 현전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현존의 대체물에 불과하다. 기호가 나타나는 순간부터, 즉 시작에서부터, 순수한 실체, 단일어, 특이성을 만날 기회는 결코 없다. 기호는 다른 기호와의 관계와 차이에 의해 의미를 지니며 이러한 의미의 생성작용이 무한히 반복되기 때문에 의미는 기호에 내재하지 않는다. 의미는 이러한 과정 속에 흩어져 있을 뿐이다. 때문에 이러한 의미를 추적하는 순간에 계속해서 그 의미가 연기된다는 것이 데리다의 차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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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궁금한 건 도대체 뱃사공님이 왜 산타클로스가 '초월적 기의'라고 했을까 하는 점... 산타클로스가 절대적인 의미, 진리, 중심이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닐테고...
현서씨의 코멘트에 대해선 조금 시간을 주시길. 일단 뱃사공님의 의견부터 답하겠습니다.

사진 자체는 슈타인호프님 블로그(http://nestofpnix.egloos.com)에서 작년쯤 업어왔는데, 미리 허락을 받지 못해 죄송합니다.
# by | 2008/12/27 19:28 | 글 | 트랙백(1) | 덧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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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산타 클로스에 대한 약간의 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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