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2월 24일
현서의 '한국 환상문학의 긍정적 미래에 관하여'에 관한 철학적 비판.
현서의 '한국 판타지의 긍정적 미래에 대하여' 에 대한 철학적 비판.
현서, '한국 환상문학의 긍정적 미래를 위하여' -1부
현서, '한국 환상문학의 긍정적 미래를 위하여' -2부
00. 철학적 비판에 대하여,
철학적 비판은 훈계술이 아닌 교양교육을 실시하는 사람들의 행위이거니와, 플라톤이 묘사하고 있는 내용은 실질적으로는 다름 아닌 소크라테스의 탐구 방식이다. 관습이나 권위에 기초하는 ‘훈계술’ 과는 대조적으로, 소크라테스적인 철학적 비판은 확고한 방법론에 기초한 학문적 비판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쳐서 실시된다.
1) (모르면서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캐물어 들어간다.
2)그런 의견들을 모두 모아서 맞대면시킴으로써 그것들이 같은 대상에 대해, 같은 관점들에 관련해, 같은 관계들 아래에서 서로 모순된 이야기들을 하고 있음을 밝힌다.
3) 그런 의견들이 얼마나 허술하고 그릇된 것인지를 증명한다.*
나는 현서(푸른꽃)씨의 ‘한국 판타지의 긍정적 미래에 대하여’ 라는 글에 대하여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비판이라는 방법론을 사용해서 논할 것이다. 내가 이 글을 보게 된 건 약 2개월 전이었고, 그때는 워낙 바빴던 터라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갔음을 이제야 고백한다. 하지만 최근 약간의 시간이 나게 되어 그 틈에 읽게 된 이 글은 나에게 약간의 철학적 문제가 있지 않는가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다소 많은 철학자들과 문예이론가들이 나오는 이 글은 그 수많은 단어들이 일견 유기적으로 짜여진 것으로 보이나, 내가 보기에는 이 글은 너무 많은 인용에 따른 치명적인 오류를 품고 있다. 그것은 현서씨가 몰랐을 수도 있고, 혹은 의도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모순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현서씨의 글은 기본적으로 이런 구조를 띄고 있다.
①환상소설의 정의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②캐서린 흄의 환상문학을 정리한 것에 대해 부족함을 말하고, 토도로프의 환상소설에 대한 ‘망설임’의 개념을 소개한다.
③토도로프의 ‘망설임’ 개념이 포스트구조주의의 언어학 개념에 영향받았음을 말하면서, 포스트구조주의 비평의 주요한 인물 중 하나인 롤랑 바르트의 ‘저자의 죽음’을 소개한다. 여기에서 현서씨가 ‘저자의 죽음’을 강조하는 이유는 뒤에서 나올 환상소설의 주요한 특징 -예컨대 회복(Recovery)- 들이 독자와 작품 사이에서 일어나는 효용론적 특성이기 때문에, ‘저자’보다는 수용하는 ‘독자’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④영미 팬터지소설의 주요한 작가인 J. R. R. 톨킨의 환상문학 이론을 소개하며 그러한 양상의 기원을 근대 낭만주의 문학에서도 찾을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밝히고 있는 환상문학의 특징은 ‘회복’과 ‘도피’와 ‘위안’이며, 그것이 환상문학이 루카치가 말한 ‘총체성’을 회복하기 위한 움직임이라고 해석한다.
⑤현재의 한국 팬터지소설의 이러한 환상문학 이론에 따른 한계점을 논하고 있다.
⑥현재의 ‘포스트 붐’ 속에서, 환상문학이 더 이상 다른 소설과 구분되지 않으며, 때문에 그러한 환상문학의 ‘특수성’을 개방해야 할 때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 대한 내 지적은 I) ③은 사실 관계에 오류가 있으며, II) ③의 오류를 무릅쓰고서라도 환상소설을 포스트모더니즘적 특성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면 ④와 정면으로 모순되며, III)그렇다면 도대체 그가 강조하는 ‘포스트 붐’ 과 환상문학과의 연계성은 무엇이 있느냐에 대한 것이다.
01. 본문에서의 내용.
그럼 하나하나 본문을 봐가면서 말해보도록 하겠다.
현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실 토도로프가 환상문학이론에서 '망설임'을 제시한 이유는 포스트구조주의에 의해서 문예비평에서 저자가 죽었기 때문이다. 현대 문학비평이론에서 이 프랑스 신비평, 혹은 독자반응비평은 포스트구조주의-포스트모던 비평의 분파로서 특히 장르비평에서 굉장한 의미를 가지는데, 오리-토끼 수수께끼는 텍스트에 대한 독자의 관점에 따라서 '해석'의 위치가 달라진다는 주장을 편다. 같은 그림이라도 보는 각도에 따라서 토끼로 보일 수도, 오리로 보일수도 있는 독자의 관점을 주시하는 것이다. 롤랑 바르트는 <텍스트의 즐거움>에서 저자는 죽었다고 선언한다. 텍스트의 의미(기의Signifier)는 다원주의적인 개인 무의식 속으로 끝없이 후퇴하면서 소멸하고, 기표(Significant)만이 부유하며, 해체된 기의들은 개개인의 독자들 속에서 무수하게 재생산되고, 그런 독자들의 재생산과 작가의 '언어필사행위' 사이에 게임같은 긴장관계가 형성된다고 지적한다.
롤랑 바르트에 의하여 문학텍스트의 비평적 연구대상은 작품 그 자체에 대한 탐구인 형식주의와 영미 신비평을 넘어서 텍스트를 수용하는 독자들을 문예연구 대상으로 끌여들였을 뿐만 아니라, 독자와 작가의 문학적 헤게모니가 독자의 승리로 끝났음을, 작가는 죽었음을 선언하고 있다. 롤랑 바르트 이후 작가주의 비평은 종말을 고하게 되었고, 이제 텍스트와 독자 사이의 긴장관계는 '텍스트의 즐거움'에서 가장 주요한 쟁점으로 떠오르게 됐다.(현서)>
이 주장에는 사실관계의 오류가 몇 가지 있다. 일단 하나하나 지적해 보도록 하자.
첫째, 신비평은 포스트구조주의의 한 분파가 아니다.
미국의 저명한 비평가이며 이론가인 J. 힐리스 밀러는 『블랙홀』에서 1945년 이후의 문학연구를 뚜렷한 세 단계로 나눈다. 하나는 1950년대, 60년대에 승리를 차지한 신비평이고, 다음은 1970년대와 80년대 초의 구조주의, 마지막으로 1980년대와 90년대의 문화연구이다. 문화연구는 이론적 입장이 아주 다른 신역사주의, 포스트역사주의, 페미니즘, 그리고 젠더 연구를 포함한다(Miller, 59). 신비평은 텍스트에 초점을 맞췄으며, 구조주의는 언어학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신비평을 구조주의와 문화연구와 구별하는 이유는, 구조주의와 문화연구가 이론에 토대를 두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신비평이 무이론적과 반이론적인 면이 있기 때문이다. 즉, 다른 이론을 배격하는 경향이 있다. 신비평이 포스트구조주의의 한 분파라는 것은 구조주의 이후에 신비평이 등장했다는 것을 미리 전제하고 있는데, 이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다.
둘째, 오리-토끼의 언어게임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오리-토끼 수수께끼는 텍스트에 대한 독자의 관점에 따라서 해석의 위치가 달라진다는 함의보다는 상황 맥락과 그 언어공동체가 공유하는 실천적 규율에 따라 의미가 규정된다는 함의를 가진다. 언어게임이라 불리는 이 장 안에서, 언어공동체는 그 게임의 규정에 따라 게슈탈트적으로 언어를 해석한다. 즉 하나의 언어와 그에 상응하는 하나의 문법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한 가지 언어만이 존재하더라도, 그 언어가 위치한 언어게임의 장에 따라 의미가 계속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독자의 자유로운 관점을 강조하는 준거로서 적절한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소설 안에서의 언어는 그 소설적 맥락 속에서 존재하지 결코 독자의 언어게임 내에서 존재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만일 그 소설적 언어가 역시 언어게임 안에서 지배받고 있다면, 그것은 소설 내부에서의 언어게임이지 독자의 언어게임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소설을 2차세계라고 부르지도 않을 것이다.
셋째, 독자와 작가의 문학적 헤게모니가 독자의 승리로 끝났다. 라는 표현에 대하여.
나는 독자와 작가가 문학적 헤게모니를 놓고 싸우는 대상으로 보지 않을뿐더러, 반드시 최근의 연구가 독자 중심으로만 해석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최근의 문예비평은 자유로운 다원성을 강조하여, 자신이 믿는 학파로서 그 학파 나름대로의 관점을 소설 안에서 찾는 것에서 의의를 찾는다. 즉,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내에서,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가들은 모더니즘의 흔적과 포스트모더니즘의 흔적을 동시에 찾기도 하고, 페미니즘 비평가들은 몰리 블룸의 여성학적인 변화에 주목하기도 하는 것이다. 하나의 작품 속에서 다양한 학파가 공존한다. 때문에 꼭 독자의 승리로 끝났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의 눈으로만 봐야 한다. 라는 주장은 약간 어폐가 있다. 예를 들어 정신분석(psychoanalytic) 비평(라깡이 대표적임) 같은 경우는 텍스트보다는 저자에 주목한다.
***
하지만 현서씨의 주장의 핵심은 이것이 아니다. 현서씨 주장의 핵심은 포스트구조주의 이론은 ‘저자의 죽음’ 을 발생시켰고, 그것이 의의를 지닌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의의를 지니는지는 현서씨의 다음 문단에서 알 수 있다.
<<문학의 환상성은 독자의 반응에 따라서 결정된다. 이것이 토도로프가 롤랑 바르트 밑에서 신비평을 배우고 환상문학이론의 '망설임'을 말한 결정적 근거가 될 수 있다. 바르트의 신비평은 텍스트의 2차세계를 작가로부터 떼어버렸고, 전적으로 독자와 즐길 수 있는 게임이라고 상정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롤랑 바르트의 독자이론은 독자수용의 입장에서 장르문학의 특징들을 고찰할 기회를 열어주었고, 토도로프는 환상문학의 장르적 특징을 '망설임'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다. 결국 환상문학이라는 이 애매모호한 장르는 그것을 읽는 사람이 망설임을 가지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서, 경이감을 가지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범주를 나눌 수 밖에 없는 굉장히 유동적이고 독자중심적인 성격을 가진다.
우리는 호메로스의 그리스 고대 에픽Epic 서사시인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등과 더불어 중세의 기사문학 - 소위 로망스Romance라고 불리는 - 을 판타지소설의 효시라고 꼽고 있다. 우리는 볼프람 폰 에센바흐의 <파르치팔Parcifal>이나, 하르트만의 <이바인Iwein>, 혹은 중세 독일 민중서사시의 대작인 <니벨룽겐리트>, 단테의 <신곡>을 환상소설의 효시라고 말한다. 현대인인 우리들이 그 작품을 읽어나가면서 경이롭고 생경한 이야기들 속에서 '망설임'을 가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세인들은 이 이야기를 당시 그리스적 총화나 카톨릭이라는 패러다임 위에, 은총으로 가득찬 당위적 세계 안에서 펼쳐지는 낭만적 모험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이 작품들은 경이로운 회복효과Recovery를 가져다줄 지언정 망설임을 가지게 되지는 않는 것이다. 이것은 고대 - 중세 서사문학의 주요한 특징이기도 하다.(현서)>>
일단 현서씨가 토도르프에 대해 은근슬쩍 넘어갔다는 사실을 눈여겨보자. 그것이 의도적인지, 아니면 자신도 모르는 실수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일단 이것은 토도로프를 환상문학 이론가로 소개하고, 그리고 롤랑 바르트의 제자인 포스트구조주의자로서 소개함으로서, 환상문학은 포스트구조주의 문학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는 것이다. 사실 현서씨의 주장의 2부는 거의 대다수가 환상문학은 포스트모더니즘적인 문학이다라는 전제 위에 전개되고 있다.
그리고 또한 판타지소설의 기원을 낭만주의 문학에서 찾고 있다는 점은 후에 말하겠지만 재미있는 결과를 낳는다. 낭만주의 문학이 환상소설의 효시라는 것의 의의는 무엇일까? 조금 후에 한 번 논해보도록 하자.
현서씨가 ‘저자의 죽음’에서 찾는 의미는 효용론적 비평이 수월하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것은 환상문학에서 환상문학이 독자에게 회복효과를 가져다 줄 수 있다는 의의를 가진다. 그렇다면 그 회복효과란 무엇인가? 그것을 현서는 톨킨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톨킨은 이 글에서 환상문학이 다른 문학보다 더 많이 간직하고 있는 문학적 - 미학적 기능으로 환상Fantasy, 회복Recovery, 도피Escape, 위안Consolation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상상력과 거의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는 환상은 개인 - 독자적 세계의 관련성을 상기하면 위에서 지적한 문학내의 환상성과 상통하는 부분으로, 환상문학의 본연적 속성에 속한다. 무엇보다도 톨킨이 강조했던 환상문학의 가장 커다란 기능은 회복Recovery이다. <나르니아 연대기>의 저자이자, 그의 동료였던 C.S 루이스 역시 "환상소설에서 마법의 숲을 경험한 독자가 현재의 숲을 새로이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환상의 위대함이다."라는 경이적 환상회복효과를 강조하면서 톨킨의 의견에 동의했다.
환상문학으로서 회복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환상문학을 말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그리고 톨킨이 가장 강조한 점이다. 환상문학의 나머지 두 가지 효과, 그러니까 현실로부터 참되게 도피하고 거기서 위안을 얻는 것은 모두 이 환상의 회복을 전제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중략)……톨킨의 환상회복론은 캐서린 흄에 의해서 문학 텍스트의 환상성이 독자가 경험하는 현실 세계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 지 단적으로 설명해준다. 캐서린 흄은 톨킨의 환상문학론을 제시하며, 톨킨이 말하는 환상문학의 효과는 작품이 텍스트의 2차세계를 뛰어넘어서 독자가 살아가는 세계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쳐 독자를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 변화는 교조적인 플라톤이나 유희적인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둘을 조율하는 호라티우스의 시론을 뛰어넘어 전혀 다른 메신저 문학Messenger Literature로서 '회복'을 말하고 있다. 이 환상은 경이로운 시선으로 가득 찬 낭만적 환상의 세계이다.
루카치는 고대 그리스시대이후 총체성은 상실되고, 상실된 총체성 속에서 자아를 찾아 고독히 방랑하는 모험의 내러티브가 바로 소설의 발생과정이라고 말한다. 현대가 진행될수록 소설문학에서 등장하는 서사시적 총체성은 파괴되고, 파편화된 자아가 총체적 모험을 감행하는 고독한 방랑의 길이 바로 소설미학이라고 루카치는 <소설의 이론Theory Of The Roman>에서 지적한다. 루카치는 이러한 현대 이전의 아무런 '불안과 두려움이 없는' 총화된 그리스적 시대를 낭만적 문학성으로 상정하는데, 이런 낭만성은 톨킨과 일련의 환상문학 작가들이 말하는 '회복'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은 분명한 것 같다. 톨킨은 자신의 작품이 가지는 회복효과가 바로 이런 신화시대에서 버림받은 고독한 현대인에게 고대 그리스 서사시적 총체성을 '회복'하려고 한 낭만주의적 색채를 진하게 띠고 있다.
톨킨은 가장 과격하면서도 참신한, 문학 내에서의 환상의 '기능'에 대해 언급한 거의 유일한 작가였다. 그리고 그의 회복효과는 깨어진 총체성의 시대인 고독한 현대에 독자들을 다시 고대의 그리스-신화시대의 총체성으로 돌려보내고(도피Escape), 그곳에서 위안(Consolation)을 얻으며, 다시금 고대 신화시대 인간들의 총체적 감성을 현대인들이 회복(Recovery)하기를 바랐던 것은 아닐까? 톨킨의 걸작인 반지3부작 - <호비트>, <반지의 제왕>, <실마릴리온> - 이 현대인들의 신화라는 극찬을 받으며 현재까지도 고전으로 널리 읽히는 이유는 톨킨 스스로가 믿고있었던 환상의 네가지 효과를 자신의 작품에서 온전히 표출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루카치적 관점에서는 분명 도피주의적이고 위안적이지만, 동시에 회복적이고 - 톨킨 스스로가 말했듯이 - 복음적이다. 자아마저 상실되가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톨킨은 고대로의 '회복'을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타자他者의 현실에서 참되게 도피하고 거기서 위안과 회복을 얻는다는 점에서 장르판타지는 문학의 하위장르로서의 가장 위대한 업적을 발견할 수 있다. 만일 누군가가 문학의 특수성으로서 판타지소설을 이야기한다면, 현재까지 밝혀진 가장 위대한 특수성은 바로 이 회복과 위안임이 분명하다.(현서)>>
인용이 다수 길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읽고 나서야만이 현서씨의 주장을 이해하기 더욱 적합할 것이라 여겨진다.
현서씨는 판타지소설의 원형을 근대적 낭만주의 소설, 더 나아가 그리스 시대의 총체성을 가진 신화시대의 소설로 잡고 있다. 즉, 판타지 소설은 낭만주의 소설처럼 총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무한자의 힘이 소설 내부에 자리잡아 회복의 효과를 낸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낭만주의 소설이 무엇이기에 계속해서 나는 낭만주의 소설을 걸고 넘어지는 것일까? 낭만주의 소설의 특징은 무한자와 유한자가 예술작품 속에서 만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무한자란 쉽게 말해 신 같은 초월적 관념이고, 유한자는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실재적 실체라고 생각하면 된다.
독일낭만주의자의 대표로 뽑히는 노발리스를 보자. 그는 피테의 지식학에서 출발한다. 피테의 지식학은 단순한 로고스의 학일 뿐이지만, 자아는 논리적이지 않고, 그것 이상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개념적으로는 파악이 되지 않는 것, 즉 인간이 사유해선 안 되는 무한자를 어떤 방법으로든지 소유하고 싶어하고 지배하고 싶어한다. 이때 관념론은 마력의 작품이고 이 마력을 직관하는 철학자는 마법사이다. 산출적구상력(Einbildungskraft) 속에서 비아(Nicht-Ich)를 자신으로부터 마력으로 불러내는 자아는 이미 마술적 원천인 것이다.
휠덜린은 어떤가. 휠덜린은 예술가의 행위는 무한자를 유한자 속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게 하는 것이라고 본다. 형이상학에의 경향(무한자에의 추구)은 예술가적 창작의 충동과 매우 유사하다고 주장하면서, 그 둘은 창작자의 영혼에서는 하나라고까지 주장한다. 창작은 자유로운 상상력의 일이고, 현실적인 것을 넘어서는 신적인 떠돎의 상태에 있지만 철학은 현실적인 것에 대한 사상적 포착이고 파악이며 인지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둘은 동일한 세계에 관계하고 있고, 동일한 존재를 반영하고 있다. 그 대상은 바로 무한자이다. 무한자는 예술과 철학의 공통대상이다. 따라서 예술가가 창조하는 미의 본질은 유한자와 합치하는 무한자에 있다. 우주는 살아있는 유기체일 뿐만 아니라 일관된 예술작품이기도 하며, 정신의 무의식적, 근원적 시이다. 예술품은 소규모의 우주이고 동일한 정신의 드러남이며, 단지 의식적으로 창조된 계시일 뿐이다. 이러한 포괄적 동일성이 직접적으로 파악되는 곳은 바로 예술가의 의식이다.
즉, 낭만주의자들의 문제의식은 무한자를 유한한 예술작품 안에서 펼처보이려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칸트로부터 발생한 움직임이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이성의 한계를 그었다. 즉, 인간이 알지 못하는 세계를 인간이 알아서도 안 되고 논해서도 안 되는 세계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낭만주의자들은 그런 인간이 알지 못하는 세계, 즉 인지 바깥의 세계(무한자의 세계)를 예술작품 속에서 성취함으로서 예술작품은 초월적인 기의를 띨 수 있다고 본다. 이를 인간이 보고 무한자적 이데아를 포착하게 되는 것이다. 즉, 이것은 가장 기본적으로 플라톤주의적인 입장이거니와, 낭만주의적이다. 지금 현서씨는 판타지소설의 원류로 낭만주의 문학을 지적하고, 또한 그 무한자적 이데아의 포착을 ‘회복’ 이라는 용어를 통해 정의하고 있다.
한 마디로 정리해보면 이렇다. 현서씨가 환상소설이 의의를 갖는다고 보는 이유는 환상문학이 낭만주의 문학처럼 무한자(혹은 초월적 기의)를 문학작품 속으로 끌어내려 구현하고 있으며, 독자들은 바로 그것을 인식하고 거기에서 효용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현서씨의 이 표현, "환상소설에서 마법의 숲을 경험한 독자가 현재의 숲을 새로이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환상의 위대함이다." 라는 C.S. 루이스를 인용한 것으로도 충분할 것이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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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지점에서 앞의 ‘저자의 죽음’을 다시 거론하고자 한다. 즉, 현서씨가 환상문학의 원류를 낭만주의 문학에서 찾음과 동시에, 포스트구조주의의 ‘저자의 죽음’ 때문에, 환상문학이 효용론적 가치를 획득한다고 하는 주장은 서로 모순되는 이야기이다. 내가 보기에 이 이야기를 진심으로 했다면, 바르트의 ‘저자의 죽음’에 대한 모종의 요약만 봤거나, 도대체 저자가 죽었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모르는 것이거나 중의 하나일 것이라 여겨진다.
저자가 죽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기존의 비평은 작품이나 텍스트를 저자와 관련하여 다루었다. 이 작품은 어느 시기에 어떤 사회역사적 조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그 때 저자는 어떤 사상에 영향을 받았고, 이 작품에서 저자의 의도는 무엇이었고 등등. 이를 입증하기 위해 그 당시 정치적 사건과 저자가 읽은 책들, 저자의 편지나 일기 관련된 친구나 동료의 증언 등이 동원된다. 그리고 그가 쓴 다수의 작품들은 그의 사상이나 태도와 관련하여 통일성을 갖는 것으로 해석된다. 혹은 좀 더 유연하게 받아들이면 현재의 지평에서 작가가 작품에 담은 의미를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그 세부적인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대개는 작품에 메시지를 담아 번역하는 발신자가 있고, 작품은 그 메시지가 담긴 매개체이며, 수신자는 당시의 코드나, 그것에 현재의 맥락을 섞어서 작품을 해석하고 그에 담긴 메시지를 수신한다는 전통적인 소통(communication)이론 모델에 입각해 있다. 즉 작품에서 작가의 메시지를 읽거나 해석해 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저자라는 개념은 최근까지 상대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롤랑 바르트의 『저자의 죽음』, 그리고 미셸 푸코의 『저자란 무엇인가』가 연이어 발행되면서 문제가 촉발되기 시작했다. 단순한 측면에서, 저자란 작품을 쓰는 사람이다. 그러나 푸코가 지적하듯이, 그거 무엇이건 쓰는 사람을 저자라고 할 수는 없다. 사적인 편지는 그것을 쓴 사람에 의해 서명되고 날인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서명 날인한 사람이 저자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과학이론을 쓴 저자를 저자라고 하지는 않는다. 때문에 그러한 글쓰기는 문학작품에 대한 저자의 관계가 별개인 것을 말하고 있다.
저자를 '문학 작품에서 글을 쓰는 사람' 이라고 상정해도 문제는 남는다. 『소피스테스』는 존재 물음을 구체적으로 다룬 최초의 텍스트이다. 플라톤이 쓴 것으로 알려진 이 텍스트 안에 그러나 플라톤은 없다. 이 텍스트에는 ‘나’(또는 ‘우리’)로 표현되는 저자=주체가 등장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 책에서 플라톤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없다. 그래서 늘 이런 물음이 제기되고는 한다: 대화편의 어디까지가 플라톤의 생각을 담고 있고 어디까지가 타인들의 생각을 기록/해석하고 있는가? 대화편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의 생각은 물론 소크라테스를 논박하는 상대방의 생각까지도 플라톤이 구성한 것이다. 그 생각들은 기록된 것들인가 창작된 것들인가. 어디까지가 역사적 소크라테스이고 어디까지가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인가.***
때문에 저자라는 용어를 다룰 때는 우리는 항상 조심해야 한다. 저자라는 용어는 한 작품의 글쓰기를 개인의 인간적 출처에 더 많이 부여한다. 거기엔 어떤 특별한 종류의 글쓰기가 존재해야 한다. 그러므로 가정된 관계기능은 사회 속의 특정한 담론들의 존재, 순환, 그리고 기능의 모형이라는 특성을 나타낸다. 작가를 논한다는 것은 전달과 순환을 지배하는 담론과 관습의 공유된 지식에 호소하는 것이다. 저자는 권력을 가진 존재이며, 동시에 그 담론에 속박되어 있다. 만일 지금까지 뛰어난 판타지 소설을 써 온 이영도가 갑자기 환상출판사에서 양판소를 출판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을 믿겠는가? 그 불신임은 저자의 권력이자, 동시에 이영도 자신도 뛰어난 작품을 내놓아야 한다는 담론의 속박자임을 말해주고 있다.
바르트는 저자의 권력을 이데올로기 기능의 범위에 속하는 권력으로 간주하면서 이의를 제기하는 데 열을 올린다. 그는 작품을 썼던 사람과 관련하여 작품을 설명하라는 것은 치명적인 개인주의에 속박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그것이 개인 생산자의 상상된 자아 속에 작품을 감금시킨다고 주장한다. 저자와 신으로부터 나온 개인적 진술이 아니라, "문화의 있을 수 없는 중심으로부터 끌어낸 인용문들의 조직" 으로 인식되어야 작품에서 텍스트로 이동되는 대안적 견해가 생긴다고 본다. 그러므로, 포스트구조주의적 관점에서 작가는 현존을 발생시키기보다는 현존의 장소로서 인식된다.
바르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글쓰기는 모든 목소리, 모든 기원의 지점을 파괴한다. 그것은 주체가 사라지는 중립적, 혼합적, 비스듬한 공간이다. 모든 정체성은 신체 글쓰기의 바로 그 정체성과 시작하면서 사라지는 부정적인 것이다."
바르트가 속한 포스트구조주의는 작품을 기호들의 구조화된 망으로 본다. 단어나 문장, 음표들, 혹은 색채와 형태는 그것들 간의 내적인 구조로서 인식된다. 따라서 어떤 문장이나 이미지의 의미, 그리고 어떤 부분의 의미는 작가의 의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오히려 그것과 관련된 다른 문장들, 그리고 다른 이미지들, 그것들을 조직하는 전체적인 구조 안에서 결정된다는 것이 그들의 견해이다. 그러므로 저자라는 특권적인 주체가, 작품의 의미를 발생시키고 그곳의 귀결점인 어떤 중심으로 취급될 수 없다. 그러므로 비평은 작가에 대해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으며, 작품의 내적인 구조를 찾아내는 데 주력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의 죽음' 이 선포된다. 그것은 철학에서 일어난 주체의 해체와 동형적인 것이다.
저자의 죽음은 주체의 해체와 동일하다. 그렇다면 주체란 무엇을 말하는가? 주체란 의미를 생산해내는 어떠한 중심, 기의를 생성해내는 원천을 말한다. 중심이라는 것은 곧 데카르트 이래로 내려온 어떠한 '주체' 다.
데카르트는 신에게서 인간으로 주체를 세움으로서 근대 철학의 아버지로 평가된다. 그런데 현대철학은 이러한 주체를 중심으로 세운 것이 필연적으로 타자에 대한 관심을 없앤다고 지적한다. 때문에 포스트모더니즘은 주체를 거부하고 타자에 대해 관심을 보인다. 유럽 중심주의에 대항하여 미개인들에 대한 레비-스트로스의 사유, 플라톤의 말중심주의에 대항한 데리다의 헤체의 사유, 지금과 같이 어떠한 작가라는 주체에 대항하는 롤랑 바르트의 사유 등등. 이러한 주체의 출발은 일단 어떠한 초월적 실체가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때문에 초월적 기의의 현존을 거부하는 것이 해체론적 사유의 특징이다. 지금 현서씨는 환상문학이 이러한 포스트구조주의 시대에 효용론적 가치를 지닌다고 진술하고 있지만, 그 효용론적 가치가 낭만주의가 가지는 초월적 기의라는 점을 감안해볼 때, 그것은 저자의 죽음이 무엇을 뜻하는지 고려해보지 않았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다. 다시 말하지만, 저자의 죽음은 기의의 해체를 뜻하며, 바로 그 해체의 대상은 낭만주의가 그렇게 포착하고자 했던 총체성이다.
이에 대해 이진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철학적인 포스트모더니즘은 1960년대 프랑스에서 본격화된 철학적 흐름과 관련되어 있다. 구조주의나 포스트구조주의 등으로 흔히 분류되는 이 흐름은 근대 철학이 서 있는 지반을 공격한다. 데카르트 이래 근대 철학이 발딛고 있던 ‘주체’ 라는 범주, ‘진리’라는 범주 등을 비판 내지 해체하며, 세계나 지식이 하나의 단일한 전체일 수 있다는 ‘총체성’ 개념을 비판한다.****
어떤가, 어디에서 많이 본 총체성이라는 말 아닌가?
솔직히 말해서, 포스트모더니즘을 낭만주의와 결부시키려는 시도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만일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원’이 낭만주의까지 올라설 경우, 그것은 중세의 아우구스티누스로, 또한 고대의 아리스토텔레스로까지 소급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주체를 부정하고 초월적 기의의 현존을 부정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포스트구조주의의 문제의식이 무화(無化)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대표적 포스트모더니즘 작가로 뽑히는 보르헤스의 경우는 무엇인가? 그는 분명 환상을 그의 소설 속에 구현하지만, 동시에 매우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작가로 평가받는다. 현서씨는 그러한 이유가 그의 환상에 있다고 보지만, 그의 경우는, 예컨대 『픽션들』에서, 존재하지도 않는 저자를 만들어 인용하거나, 어떤 저자가 쓰지도 않은 책을 인용하고, 있지도 않은 잡지를 인용하는 등의 허구(픽션)를 만들어냄으로서 저자 기능을 신랄하게 조롱하고 있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스트로 꼽힌다. 물론 현서씨의 기준에는 그것이 그가 환상성을 통해 독자효용론적인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내가 볼 때, 이러한 것은 철학에 대한 몰이해(沒理解)에서 나왔다고 본다. 아니면 단순한 단어만을 가지고 언급한 것에 불과하다. 일단 초월적 기의를 취함으로서 효과를 얻는 환상문학이 초월적 기의를 부정하는 포스트구조주의 시대에 와서 드디어 가치를 얻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지지 않겠는가?
텍스트는 나름대로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변화들을 초월하고 있다. 텍스트는 선재된 생각, 경험, 정체성에 도전하며, (S. T. 코울리지가 설명하는) “불신의 중지” 를 우리에게 요구한다. 정확히 말해 우리가 문학작품에 가치를 두는 한 가지 이유는 문학작품이 우리와 익숙한 생활, 경험, 그리고 정체성들과 다른 것들과 함께 살고 공유하기 때문이다.
나는 현서씨의 말에 동의하는 부분도 있고,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문제이지 현서씨의 문제는 아니다. 현서씨의 문제의식이 그것에 대해 확고하게 말하고 있다면, 또한 그것이 논리적으로 맞는다면 그건 서로의 관점의 차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서씨 글의 논리적 연결성이 떨어져 내가 그것에 대해 동의하지 못하는 것은 현서씨의 문제로 볼 수밖엔 없다. 나는 지금 이것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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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이정우, 신족과 거인족의 투쟁.
**이진경, 문화정치학의 영토들.
***이정우, 신족과 거인족의 투쟁.
****이진경, 노마디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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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이사야 벌린의 『낭만주의의 뿌리』, 제레미 M. 호손의『문예비평사전』, 움베르트 에코의,『포스트모던인가 아니면 새로운 중세인가』, 롤랑 바르트의『저자의 죽음』,알렉스 켈리니코스의『포스트모더니즘 비판』,미셸 푸코의『저자란 무엇인가』,자크 데리다의『해체』,반성완 교수가 번역한『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을 참고했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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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수정, 링크를 덧붙이고, 강조를 하고, 몇 가지 보론을 첨부. 피곤해서 하지 못했던 출처도 명기.
# by | 2008/12/24 01:49 | 글 | 트랙백 | 핑백(1) | 덧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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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서씨가 내 글을 읽고 장문의 코멘트를 남겨주셨다. 내가 현서씨에게 글을 쓴 것은 물론 인터넷이라는 공간이 단지 작가에서 독자로만 메세지가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쌍방향적으로 독자 ... more
일단 사실관계의 문제에 있어서 저는 이론의 문제를 끌어오는게 아니라 비평의 실재문제를 직접 파악했습니다. 이를테면 구조주의비평과 신비평의 경우 저들은 다르다고 주장하고 있지만(분명 이론적으로 분리하고 있는것도 사실입니다.), 구조주의자들의 텍스트 분석(제가 구조주의와 형식주의를 혼돈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야콥슨이나 토도로프, 라캉의 텍스트 분석들)의 구동 메커니즘은 본질적으로 신비평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프라하학파에서 분리된 형식주의자들 (이를테면 쉬클롭스키의 <트리스트람 샌디>의 텍스트 분석)과 토도로프의 대중소설 분석 기법이 본질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지 - 이 부분은 매우 복잡하고 미묘한 문제가 되겠습니다만 - 저는 읽어고보고 실재로 구조주의비평과 신비평을 문창과 수업해서 훈련하기도 했지만, 찾지 못했기 때문에 사상이 다르다고 해도 같은 맥락으로 묶었던 겁니다. 이 글을 쓸 당시에 제가 영미 신비평을 공부하고 있을 때였기 때문에 그쪽으로 경도될 수도 있었으니, 이 부분은 차후에 수정을 할 생각입니다.
암튼 일단 확실히 해둘것은 이 글을 쓸 당시에 제가 포스트모더니즘에 심취해있던 때라, 지금과는 입장이 조금 다르기도 하고, 복잡한 문제가 많이 꼬여있어서 이 자릴 빌어 변명할 것은 못될듯 하니 큰 얼개만 몇개 얼렁뚱땅 넘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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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이 글이 좀 더 꼼꼼한 글이 되기 위해서는 몇가지 보충이 더 선행되야하겠군요. 한빈님께서는 바르트에 대하여 '저자는 어떤 사상에 영향을 받았고, 이 작품에서 저자의 의도는 무엇이었고 등등. 이를 입증하기 위해 그 당시 정치적 사건과 저자가 읽은 책들, 저자의 편지나 일기 관련된 친구나 동료의 증언 등이 동원된다. 그리고 그가 쓴 다수의 작품들은 그의 사상이나 태도와 관련하여 통일성을 갖는 것으로 해석된다. 혹은 좀 더 유연하게 받아들이면 현재의 지평에서 작가가 작품에 담은 의미를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이런것과는 관계 없이 저는 기호학자로서의 롤랑바르트가 말한 '텍스트의 즐김과 즐거움'사이의 기호학적 삼각형에 주목을 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제가 예전에 썼던 졸필이 하나 있긴 합니다만...) 저자가 죽었다는 것은 '창작자로서의 저자'가 '필사자'가 되는 과정을 의미한다고 바르트는 지적했습니다. 저는 이 과정에서 '독자는 텍스트의 완성자'가 되고 필사자와 - 바르트의 의미를 빌리자면 - 연주자 사이에서 꼬심과 꼬임의 관계를 가지고 게임을 형성하는 그 관계 자체를 이야기하려고 바르트를 끌어온 건데, (그러니까 아마 후기 바르트의 주장으로 이 글을 읽으면 문제가 생길수도 있겠군요. 처음 알았습니다.) 이걸 따온 이후는 사실 여기서 논의가 더 나아가면 헤르만 헤세와 테오도르 아도르노를 데려와야하기때문입니다. 이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아직 정확한 정리를 하지 못했기 때문엔 그냥 저의 치명적 오류라고 보셔도 무방하겠습니다.
낭만주의에 대한 정의에 대해서 훌륭하게 설명해 주셨지만, 한가지, 노발리스 경우 피히테의 영향을 받은것은 사실입니다만, 낭만주의 미학이 플라톤적이라는 데에 대해서 저는 다소 회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분명 슐레겔은 그렇게 언급한 부분이 많지만, 남겨진 텍스트로서의 '노발리스'의 작품들이나 푸케, 아이헨도르프 등의 작가들의 작품 안에는 분명 플라톤적 사유는 존재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이헨도르프는 다소 그런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지만, 지극히 종교적인 성향입니다.) 낭만주의자들의 '상징화Symbolize'가 형이상학적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는 통설에 대해서 저는 다소 회의감을 가지고 있는데, 그 까닭은 아이헨도르프가 기반하고 있는 '성서'에 대한 시적 해석이나, 노발리스가 피히테보다 훨씬 깊은 곳에서부터 기반하고 있는 '야콥 뵈메'의 그노시즘적 낭만화(일단 편한대로 이렇게 부르겠습니다)는 플라톤주의와 완전히 다른 범신론적 속성을 다소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야콥 뵈메에 대해서 주의깊게 공부하려고 접근하는 사람중 하나로서, 노발리스와 야콥 뵈메의 관계는 움베르트 에코가 말한것 처럼 '중세'와 '현대' 사이에 해리를 찾아낼 수 있는 점중 하나가 될지도 모른다는게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노발리스가 너무 경도되어 읽히는게 아닌지도 모르는 생각이 드는 것도 이런 까닭에서 였습니다. 야콥 뵈메와 노발리스의 관계 대해서는 프리츠 마르티니의 <독일문학사>에 간략히 서술되어있습니다. 그 밖에 야콥 뵈메에 대한 내용은 신비주의나 영지주의 교리서 혹은 개설서 등에 산발적으로 번역되어 소개됐습니다. 그러나 이 부분은 문예이론과는 다소 멀어지는 내용이기때문에, 개인적 지침으로 참조정도만 하세요. 철학이나 비평을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매우 어려운 내용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본적으로 종교학의 범주니까요.
저는 지금 포스트모더니즘의 끝자락에서 낭만주의(노발리스,아이헨도르프)와 아도르노를 연결하는 고리를 찾고 있습니다. 뭐 아도르노 자신도 두 작가에 대한 글을 다소 쓰긴 했습니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제가 찾아내려는 부분은 아도르노가 미학이론에서 말한 '부정으로서의 예술'과 벤야민이 말한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에서의 <아우라Aura>(이 개념 자체도 야콥 뵈메에 기반한 신비적 개념이라는 점)를 가지고 고민하는 것이 제 개인적인 문제의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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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니저쩌니하다 글이 장황하고 길어졌는데, 변명거리도 못되는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나중에 기회가 되면 이 문제에 대해서는 같이 생각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저는 텍스트 오독을 즐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