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유서遺書를 쓰며.



 

시작 노트의 첫장에
시의 첫문장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고백하자면 나는 그 때 죽어가고 있었다
그날따라 해는 쪼아대었고 죽은 나무에는 쉼터조차 없었으며
귀뚜라미도 위안을 주지 않는
아스팔트에서 피어난 하얀 아지랑이만이 기울이는
붉은 바위 그늘 아래에서
우리는 다만 쓸데없는 짓만을 되풀이하며
마치 어쩌면 고사하는 가시나무처럼
차가운 수분을 갈구하지만 그 안에는 아무런 힘이 없는
터덜거리지만 그 속에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결국 지배하는 것은 두통과 일사병, 화농, 열점 뿐이었던

작년 오늘과 같은 날짜에
카르타고로 그때 나는 왔다
불타는 도시와 현실감 없는 광기가 용광로처럼 끓어 넘치는 곳으로
내 발밑에는 실어증 걸린 그림자가 하나쯤은
함께 있었는지도 모르고 그 그림자의 색깔은
푸른 색이었을지도 모르는
너무나 어두워 부르고 싶은 노래를 들녘에 버리고
한밤에 읊을 시를 실삼나무 끝에 걸어버려
더이상 아무런 및을 남겨 놓지 않는 아주 어두운 군청색과
너무나도 어두워 내 발목을
쐐기풀처럼 감아 끌어당기는 그림자가 있었을지도 모르는
그곳에

고백하자면 나는 그때 죽어가고 있었다

작년, 어느 장소로
나는 오늘과 같은 날짜에 왔다
여름은 아주 위대했다
무너져가는 포도에 마지막 달콤함을 달아매었으므로
그러나 나는 포도가 아니어서
우리는 다만 쓸데없는 짓만을 되풀이하며
오가며 미켈란젤로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쓰러져 가는 나무처럼 중얼거린다
그리고 정말 시간은 있겠지

<서두르세요 닫을 시간입니다>
여보세요, 대답해요. 당신은 그곳에 있습니까?
아니오 나는 이곳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누구요?
세어보면 당신은 없고 나 하나뿐인데
내가 이 하얀 길을 바라보면
내 옆엔 언제나 또 한 사람이
밤의 망토를 휘감고 소리 없이 걷고 있어
두건을 쓰고 있어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하여간 내 곁에 있는 제삼자는 누구요?
아 내가 지금 대답을 하고 있습니까?
<서두르세요 닫을 시간입니다>

작년
오늘과 같은 날짜에 우리는 만났다
내 그림자는 당신을 만난 뒤로부터 더 짙어졌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보라, 당신의 눈은 진주로 변했다
당신의 눈 앞에 그걸 바라본 내가 도리어 부끄러워졌다
그래서 나는 이따금 그대를 보고 놀랐지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알지 못하는 까닭은
나와 너의 눈이 늘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었으므로

그래서인지 내가 너를 수사(水死)한 채로 떠올릴 때마다
언제나 그 눈동자를 떠올리곤 했다
그리고 당신의 눈동자를 떠올리는 언제나
나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당신의 눈을 지워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 진주의 샘은 내 심장을 잘라내고 녹이고 베어 갔으므로
그러나 생각은 남았다

이 움켜잡는 뿌리는 무엇이며
이 생각에서 어떤 흐름이 뻗어 나오는지
나는 말하기는커녕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다가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기 때문에

하늘로 날아가는 땅과 바닥으로 떨어지는 땅
그곳에 나를 부르고, 가게 하고, 남게 하는
트럼펫 소리는 검은 빛깔의 고독을 들려준다
그 속을 통해 잠깐 동안의 꿈속에서처럼 우리는 미친다
집들은 우리들 뒤에서 쓰러지고
골목마다 비스듬히 기운다
땅들은 물러서며 우리는 그것을 잡는데
우리들은 말馬들이 빗소리처럼 속삭여댄다
기억하는가 8월의 긴 눈짓을
그대 속에서 돌이 구르고 또 별이 구른다
내 몸에 지닌 모든 것만이
풍요해지고, 내가 되고
나무가 되고
하늘로 날아가는 땅과 하늘로 떨어지는 하늘
——그러나 어쨌든 당신은 떠났다!

안녕, 안녕
안녕, 부인님들, 안녕, 아름다운 부인님들, 안녕, 안녕

숨쉴 때마다 뜨고 지는 별무리
입술로는 이슬 냄새 젖어오고
마지막 잎새의 손가락들이
젖은 둑을 움켜쥐며 가라앉는다
밖의 풍경은 내가 없는 듯 늠름히 사라져간다
별은 지고 있는데
도대체 밤은 어디에서 시작하는가?

그 틈바귀를 통해 당신이 가버린 그곳을 통해
한 줄기 현실이 찢어져버렸다
푸르름, 현실의 푸르름,
현실의 햇빛, 현실의 술
나는 현실과 뒤섞인다
——그런데 도대체 밤은 어디에서 시작하는가?

황혼녘의 시간이 소리죽여 조용한 발걸음으로
저 아래 깊이 지나가고 있다
나는 밤을 믿는다
내 본질의 어두운 시간들,
내 감각이 깊이 묻어 있는 그 시간들
그래, 정말 시간은 있겠지
별이 지고 하늘과 땅이 만나며 어둠이 태어날 시간이

밤은 마침내 왔다, 탑이 원한을 품은 곳에
어둠은 제 몸에 모든 것을 품으며
형상과 불꽃, 짐승과 나, 인간과 권력마저도
욕정과 추억을 뒤섞고
새를 바람과, 인간을 환상과 뒤섞는다
이제 이해되었던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곳에서 나는 너의 눈을 마주본다
그리고 때문에 나는 너의 삶을 볼 수 있었다.
그곳에는 어떤 트럼펫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트럼펫 소리! 여리고의 트럼펫 소리!
슈투카의 급강하 소리!
별무리는 언제나 그 주변의 별을 예고한다
어둠의 장막은 찢어졌다
하얀 것들이 소리 없이 밤을 가로지른다
밤의 종말을 향하여
오래된 상처
강의 마른 입술
자작나무의 흰 껍질
죽음 뒤에 나타나는 흰 터널
외로운 영혼
어린 시절의 기억
물 위에 뜬 빛
하얀 새의 넋
진주의 샘은 사라졌다
그리고 마침내 밤의 죽음이 선고된다;
모든 것은 새벽의 빛깔을 띄고 있다
밤은 마침내 살해되었다 오늘이 왔으므로
오늘은 왔다

지금 이곳엔 물이 없고 다만 바위뿐
바위 있고 물은 없고 모랫길뿐
길은 구불구불 산들 사이로 오르고
산들은 물이 없는 바위산
물이 있다면 발을 멈추고 목을 축일 것을
바위 틈에서는 멈출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다
땀은 마르고 발은 모래 속에 파묻힌다
바위 틈에 물만 있다면
침도 못 뱉는 썩은 이빨의 죽은 산 아가리
여기서는 설 수도 누울 수도 앉을 수도 없다
산 속엔 정적마저 없다
비를 품지 않은 메마른 불모의 천둥이 있을 뿐
산 속엔 고독마저 없다
금간 흙벽집들 문에서
시뻘겋게 성난 얼굴들이 비웃으며 우르렁댈 뿐

만일 물이 있고


바위가 없다면
만일 바위가 있고
물도 있다면

샘물
바위 사이에 물웅덩이
다만 물소리라도 있다면
매미 소리도 아니고
마른 풀잎 소리도 아닌
바위 위로 흐르는 물소리가 있다면
티티새가 소나무 숲에서 노래하는 곳
뚝뚝 똑똑 뚝뚝 또르륵 또로록
하지만 물이 없다

오늘 어느 날에
나는 그곳으로 왔다
나를 부르고, 가게 하고, 남게 하는
심지어는 묵시록의 나팔 소리마저 들려오지 않는,
때문에 내 목소리가 그대에겐 잘 들릴 것이다

나라고 해서 좋아서 한 일은 아니었다. 나는 나의 삶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고 그러는 사이에 우리의 운명은 빗나가고 말았다. 이제 나는 너를 부르노라. 우리 사이에 놓여 있던 수많은 세월의 자격으로 너를 부르노라.

샨티 샨티 샨티


***

사실 이 시는 90% 이상이 다른 시에서 따 온 인용문입니다. 인용출처는 나중에 다른 포스트로 하겠습니다.

by 한빈翰彬 | 2008/07/17 17:35 | | 트랙백(1)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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