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5월 27일
라크리모사Lacrimosa, 능동적 파멸자로서의 악마惡魔.
Lacrimosa, 능동적 파멸자로서의 악마(惡魔)
일반적으로 속임수는 인류가 언어를 통해 계약을 해 왔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존재해 왔던 것으로 여겨진다. 굳이 비트겐슈타인이나 럿셀의 이론을 들 것도 없이도, 수학 언어와 같은 특별한 언어를 제외한 모든 언어, 즉 이른바 일상 언어는 필연적으로 얼마간 모호성을 내포할 수밖엔 없기 때문에, 이러한 모호성을 이용한 속임수는 인간이 언어를 사용해 왔던 순간부터 존재해 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성문화되거나 암묵적인 규칙의 모호성을 이용해내는 속임수를 우리는 ‘사기’라고 부른다.
이러한 속임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 악마, 일반적으로 악(惡)이라는 개념의 역사 또한 오래되었다. 사실 더 오래되었을지도 모른다. 인간이 아직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근원적인 공포와 두려움은 비단 인류가 언어를 창조한 후의 시기에만 국한되어 있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근원적 공포는 인류가 태어난 순간부터, 그러니까, 세상을 인지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존재해왔던 것이다. 그리고 이 근원적 공포에 대해 인류는 주로 복종하는 양태를 보여 왔다. 이 알지 못하는 것은 악의 존재, 악마의 모습으로 형상화되어 왔는데, 이러한 악마의 모습은 고대에는 원초적으로 선신(善神)과 대결하는 악신(惡神)의 모습에서부터, 중세에 와서는 인간을 신으로서 유혹하고 꼬여 내는 모습으로까지 변해 왔다. 고대에서 중세로 악마의 모습이 바뀌어 가면서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바로 악마의 모습이 모든 악의 근원인 그런 모습이 아니라, 인간을 악마의 길로 끌어들이는, 그럼으로서 의사소통할 수 있는 그런 모습으로까지 변했다는 것이다. 의사소통할 수 있는 존재로서의 변화. 이것이 중요하다.
악마와 언어를 주고받고 서로의 의사를 전달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양자 간에 이루어지는 계약이 묘사되기 시작했다. 악마에게 어떤 대가를 줌으로서 일반적으로 인간이 모르는 어떤 것들을 알고 있다고 여겨지는 악마로부터 무언가라를 받는 형식으로서 이루어지는 계약은, 그러나 언제나 악마와 계약한 자의 파멸로 끝나는 계약이었다. 인간의 탐욕, 인간의 욕망이 언제나 그 계약자를 파멸로서 이끌어 왔고, 언제나 마지막에 악마는 그러한 계약자를 조소하며 그 탐욕스런 인간의 영혼을 가져가는 것으로서 보통 악마와의 계약은 묘사된다.(이러한 도식에서 벗어난 것으로는 바그너의 『마탄의 사수』, 괴테의 『파우스트』등이 있다.)
그런데 악마와 계약한 자들이 언제나 파멸하는 양상을 보다 보면 자연스레 이 의문을 떠올리게 된다.
‘저들이 파멸한 것은 스스로의 탐욕 때문이지 엄밀히 말해 악마 때문은 아니다. 그리고 악마는 그 계약의 집행에 있어 특별히 속임수를 쓰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바꿔 말하면 인간이 스스로를 잘 절제할 수 있고, 자신을 그 목적만을 위해 행동시킬 수 있다면, 그가 마치 시지포스와 같은 인간이라면, 악마와의 계약에 있어서도 끝까지 이득을 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것인데, 이 의심이 일정 부분 타당한 것은, 대부분의 악마 소설에서, 계약 안에서 악마가 전능자로서 등장하기는 하지만 인간을 파멸시키려 적극적으로 개입하지는 않고, 단지 인간에게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힘만을 전해 주는 방관자로서 남아있는 것처럼 묘사되기 때문이다. 즉, 악마는 인간을 파멸시키는 자로서가 아닌, 인간에게 자신의 욕망대로 마음껏 할 기회만을 부여해주고 자신은 그 파멸을 지켜보는 방관자를 자처함으로서 인간 스스로가 욕망에 취해 파멸의 한도를 넘는 것을 지켜봐야만 하는 무리수를 두게 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악마 소설에서의 묘사를 볼 때, 이 의심은 사실 당연한 것이다.
『라크리모사』를 보고 그런 말을 해 보라.
『라크리모사』에서의 중심 인물은 물론 레오나르이다. 그는 악마이며 ‘무서워 보이는 아이’ 이며 또한 『라크리모사』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의 행동 양태를 조종하는 가장 상위 차원의 인물이다. 다시 말해서, 이곳에 등장하는 모든 이들은 레오나르에 의해 움직인다.
레오나르는 악마이지만, 다른 소설에서 등장하는 모든 악마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아주 능동적인 악마이다. 그의 최종적인 목적은 루카르도가 자신을 죽이게 만듬으로서 그의 몸으로 전령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레오나르는 아주 치밀한 트릭을 준비한다. 요르겐의 예언서는 그 시작에 불과하다. 요르겐의 예언서를 통해 그가 ‘새로운 대신할 것’을 통해 세상을 멸망시킬 목적을 지니고 있다고 판단한 소피타나 다우시니 관장 역시 그의 장기말이다. 그리고 이 소피타다 다우시니 관장이 루카르도에게 레오나르의 목적을 혼동하게 만듬으로서, 레오나르는 이 두 장기말을 통해 궁극적인 목표인 루카르도를 움직인다. 작가 윤현승은 레오나르의 입을 통해, 이 일을 모두 꾸미고 조종한 사람은 ‘소피타’ 라고 대답하지만, 내가 보기엔 그조차도 루카르도가 레오나르를 죽이기 위한 레오나르의 사기에 더 가깝다. 소설의 전체적 전개를 보면, 레오나르는 세 가지 거래를 통해 루카르도에게 자신을 죽일 힘을 부여한 다음, 마지막에 베니카의 살해를 공개함으로서 루카르도에게 자신을 죽일 동기를 부여하고, 기꺼이 그에게 죽음으로서 ‘다섯 번째’ 로의 전수를 완료하는 양상을 보인다. 티에로는 그의 트릭을 몇 가지 밝혀주는 존재로서, 요르겐의 모습을 기억함으로서 레오나르가 요르겐의 모습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시켜주고, 소피타에 대한 반전을 제시해주는 존재이지만 중심 인물은 아니다. 레오나르가 처음부터 세상을 멸망시킬 목적을 지니고, 진실의 원을 벗어나기 위해 그러한 트릭을 모두 계획하였다면 물론 요르겐의 후예인 그가 주인공이 되겠지만, 레오나르의 목적은 처음부터 그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 포커판에서, 레오나르를 제외한 모든 이들은 레오나르의 패(의도)를 오판했고, 이 모든 것을 계획한 자인 레오나르는 흑막 속에서 모두를 패배시키고 자신의 의도를 이루었던 것이다. 결국 이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소설의 스토리를 이끌어 가는 인물은 다름아닌 능동적 악마인 레오나르인 것이다.
하지만 나는 또 한 명의 ‘사기꾼’을 지적하고 싶다. 다름 아닌 애매모호한 말과 치밀한 구성으로 우리 모두를 ‘낚아’ 버린 작가, 윤현승 말이다.
그 모두의 흑막에 있는 자, 윤현승.
나는 앞서 언어의 모호성을 지적하면서, “특히 성문화되거나 암묵적인 규칙의 모호성을 이용해내는 속임수를 우리는 ‘사기’라고 부른다.” 고 말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작가 윤현승은 최고의 사기꾼이다. 이렇게 우리 모두가 암묵적으로 믿고 있는 그러한 소설의 ‘규칙’ 들을 이용해 이런 사기를 칠 수 있을까!
“세라핌은 치천사를 가리키는 말로 하나님을 보좌하는 최고위급의 대천사를 말한다.” -정말?
“소설 초반부의 다우시니 관장의 피는 바로 살인 사건 당시의 피였구나!” —―정말?
“루카르도는 레오나르를 죽이고 세상을 구하는 것이었군!” ―――정말?
레오나르의 말들, 시간차의 오류, 우리의 선입견. 작가 윤현승은 정말 우리의 뇌를 치밀하게 파고들어 사정없이 우리의 뒤통수를 내리친다. 레오나르와 소피타의 말들은 언어적 모호성의 극치다. 절정에 다다른 윤현승의 구성은 우리의 상식을 그대로 따라가는 듯 하다가도 갑자기 빛의 속도로 우리에게 달려든다. ――――정말?!
이렇게 사기를 당했는데도 유쾌한 기분은 오랜만이다. 그의 구성에 쫓겨 헐떡대다가 이렇게 머리를 후려치는 충격을 받고,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읽어 나가는 책이 이렇게 즐거운 기분일 줄은 몰랐다. 뜨거운 감성이 아니라 차가운 이성으로 읽어나가는 독서였다. 다섯 번째 읽을 때는 이제 윤현승의 구성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실컷 웃었다. 아아, 이렇게 당해버리는 글쓰기는 정말 오랜만이라고. 당신은 정말 이야기꾼이라고.
후기
다 읽고 나서 무언가 암담했다. 물론 처음에 읽기도 전부터 리뷰를 쓰기로 결심해왔지만, 이렇게 아무런 것도 생각이 나지 않을 줄은 몰랐다. ‘무엇을 써야 할까?’ 그냥 책상에 머리를 파묻었다.
꿈 속에서 루카르도와 소피타와 레오나르가 삼연타로 나왔다. 다우시니와 티에로는 나오지 않았다. 상상이 되지 않아서일런지도 모르겠다. 셋이서 손을 맞잡고 춤을 추다가 소피타는 변신하고 루카르도가 레오나르를 먹었다. 레오나르의 마지막 표정은 웃고 있었다.
격렬한 진동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잠에서 깨어나서 책상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무언가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처럼 돌고 있었는데 막상 종이를 앞에 두니 아무것도 써지지 않았다. 그냥 입에서 한 마디가 나왔다. “느끼는 대로 쓰자.”
글을 썼다. 레오나르의 자세한 트릭은 말하다 보면 그냥 소설 줄거리 요약 같아서 쓰다가 그만뒀다. 그리고 쓰고 싶지 않았다. 리뷰를 쓰기 위해 책을 다섯 번 봤다. 스토리 요약만 보는 것만으로도 여섯 번째 읽는 것 같아서 그냥 두고 말았다. 다 쓰고 나니 무언가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읽었다. 프롤로그부터 갑자기 나열되는 책 제목 중에 <세라핌의 재앙>이 눈에 팍 들어오더라. 웃었다. 이번엔 무언가 찾아낸다는 느낌으로 읽었다. 유쾌해졌다. 그리고 리뷰를 처음부터 다시 썼다.
이 글의 서두는 가볍게 분석하는 마음으로 쓴 것이다. 분석하기 전에, 팩트를 점검해보면서 점차적으로 내 논조를 강화하려 했다. 하지만 중반에 가면서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재빠르게 내용을 툭툭 쳐가면서 전체적인 느낌을 강화하고자 애썼다. 쓰면 쓸수록 레오나르의 모습이 점점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보다 윤현승이 조금 더 멋졌다. 처음 읽었을 때는 윤현승에게 조금 실망했다. 내가 그의 글에서 느꼈던 감성적인 뜨거움보다는 약간 혼란스러운 모호성이 나에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기를 쓰면서 생각이 또다시 달라졌다. 윤현승, 당신은 정말 최고의 작가에요. 당신은 도대체 글마다 진화하지 않은 적이 없군요. 당신이 매번 글마다 변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소설 말고도 또다른 즐거움이에요. 다음에는 또 어떤 글을 보여줄 건가요.
# by | 2008/05/27 20:16 | 글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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