餘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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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BO 카메라 테이프는 돌아가고 있었다. 경기는 예상대로 홉킨스가 링 바깥을 점하며 그 영리한 풋워크로 틈을 노리고 있었고, 그런 홉킨스를 도슨이 밀어붙였다. 로프의 탄성을 이용해 홉킨스는 링을 훨씬 넓게 쓰고 있었다. 링줄에 몰린 상황에서, 홉킨스가 왼쪽으로 슬며시 미끌어진 다음 기민한 라이트 단발을 던졌다. 하지만 그 펀치를 예상하고 있던 도슨이 상체를 기울이며 피했다. 보통 그 상황에선 심판의 브레이크 선언 때까지 홉킨스가 레프트 바디를 계속 주거나, 혹은 홉킨스가 도슨의 허리를 타고 돌아나와 링줄에서 탈출하는 것이 그 다음 수순이었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도슨이 숙인 그 자세에서 왼쪽 손으로 홉킨스의 허벅지 아래 부분을 잡고 상체를 크게 앞으로 밀며 홉킨스를 밀었다. 단순한 숄더 푸싱이면 그냥 밀리고 끝났을 문제였겠지만, 홉킨스를 지탱해 줄 하체는 이미 허공에 붕 뜬 상태였다. 잠시의 부유는 곧 추락으로 이어졌다. 홉킨스의 왼쪽 팔꿈치가 캔버스에 가장 먼저 닿았다. 그 순간 홉킨스의 경기는 끝났다.
HBO 카메라는 오피셜 디시전이 내려지기 전까지 그 장면을 계속해서 되풀이했다. 리와인드, 리와인드…… 하지만 얼마든지 계속 되돌릴 수 있는 비디오와는 다르게, 시계 태엽은 되돌릴 수 없다. 이미 사고는 일어났고, 다시는 사고가 일어나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2
가정법은 참 슬픈 문장이다. 그때 그곳에 가지 않았더라면, 그때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이미 일어난 일들에 대해 현재가 과거에게 보내는 목소리. 하지만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그 슬픔은 거기에서부터 생겨나는지 모른다. 아차 하는 순간 운명은 어긋났고, 수없이 돌이켜보았기 때문에 다른 결론은 없다는 듯 완고한 슬픔이 그 자리를 채웠다.
작년 5월 홉킨스가 링에서 그 자신이 맛본 영광 중 최고의 것을 맛보았을 때, 나는 복싱계가 홉킨스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내 착각이었다. 내가 가진 최고령 기록을 넘어서라라고 말해 주던 조지 포먼은 홉킨스가 팔을 부여잡자 어설픈 연기 그만하라는 독설을 던졌고 제임스 토니는 홉킨스가 은퇴할 때가 도래했다고 했다.
한국 시간으로 저녁이 되어서야 홉킨스의 어께가 실제로 탈구가 되었다는 의사의 진단 결과가 나왔고 델 라 호야와 리처드 셰이퍼가 경기 결과를 NC로 바꾸려는 그 시간 동안 홉킨스는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이틀간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틀 뒤 캘리포니아 주 체육 위원회가 다시 벨트를 홉킨스에게 돌려 주라는 판결을 내놓았고 홉킨스는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시끄럽게 돌아왔다. 나는 이렇게 일이 돌아갈 줄 알았지. 토니 너는 그러니까 말년에 UFC같은 데서 구르는 거야.
그런데도 홉킨스의 떠듦엔 묘한 침묵이 있었다. 이후 홉킨스는 예전처럼 말하지 않았다. 배신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마흔 살을 넘어서부터 홉킨스가 걸어 온 길은 전인미답의 외길이었다. 예전에도 말한 바 있지만 슈거 레이 로빈슨이나 아치 무어도 지금 홉킨스가 도달한 곳에 오르지 못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매번 자신의 커리어 마지막임을 각오하고 오르는 길이었다. 나는 예전부터 홉킨스를 좋아했지만, 이젠 그가 어디까지 가는지 보고 싶다는 순수한 놀라움으로 그를 지켜보고 있던 차였다.
홉킨스가 억울하게 홈타운 디시전에 밀려 무승부가 된 파스칼 1차전을 넘어 재전에서 마침내 라이트헤비급 리니얼 챔피언 자리를 탈취했을 때, 그가 지금 은퇴한다 해도 향후 십 년 간 그가 걸은 길을 넘어설 복서는 나오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또다시 채드 도슨을 만나 방어전을 치룬다고 할 때, 도대체 홉킨스는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 궁금했다. 그는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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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이라는 말은 붓 끝에 남은 먹물 방울, 아직 못 다한 이야기를 말한다. 나는 버나드 홉킨스가 우리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더 이상 없으리라 봤다. 하지만 이제는 도슨과의 경기가 파국으로 끝나면서 그가 우리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고 생각한다. 챔피언 자리가 빼앗기자마자 그에게 보여진 냉랭한 반응을 보면서, 그가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가 하나 더 생겼다고.
마흔일곱 살의 나이, 그가 지기를 바라는 사람들, 탈구된 이후 완전히 회복되었을 지 불투명한 어께, 젊고 강력한 도전자. 이 모든 것들을 넘어서 자기를 증명하는 이야기 말이다. 그가 그런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 것인가.
4개월 전 안드레 워드를 보며 처음으로 든 감상은 슈퍼페더급 플로이드가 저기 있군이었고 그 다음에는 왠지 버나드 홉킨스가 생각났다. 그 둘이 무척 대조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기의 가진 바를 전부 펼치지 않고도 승리를 여유있게 가져가는 복서들이 있다. 프라임 로이 존스가 대표적이다. 그는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시를 손에 쥔 포커꾼처럼, 상대가 뭘 들고 나오든 자신의 패로 찍어누를 수 있었다.
모든 걸 보여주지 않더라도 승리를 가져가는 워드나 로이와는 달리, 홉킨스는 그의 마지막 승리를 얻기 위해 모든 걸 다해야만 한다. 복서로서의 자산뿐만 아니라 극작가와 연기자의 모든 재능을 끌어 모아야만 그는 커리어에 챔피언십 파이트 1승을 더 새겨 넣을 수 있다. 버나드 홉킨스는 이미 가진 바가 모두 드러난 포커꾼이지만, 계속해서 블러핑을 하고 도발하면서 마지막 한 걸음을 위태롭게 내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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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복싱은 상처가 찢어지고 신장이 터져도 그 자리에 버티고 서는 마법이고, 인내이다. 홉킨스에게 복싱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이었고, 그 길은 험난한 가시밭길이었다. 23살 홉킨스가 처음으로 프로 데뷔전을 치르고 패배를 경험했을 때부터 23년 동안 그는 자신의 복싱 인생을 인내로 가득 채워 왔다. 탄산 음료를 입에 대지 않고, 술과 담배를 멀리하고, 정크 푸드를 눈에 거들떠보지도 않으며 20여년을 보내었다.
선수 생활 내내 인기가 많았던 적은 극히 드물었고, 언제나 실력에 비해 적은 관심을 받았기 때문에 눈을 끌기 위해 어리석은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잘못에 대해 아주 드물게 사과했으며 그 모든 복잡다난함에도 결국 그는 현명했다.
엔트윈 에콜스, 세군도 메르카도, 저메인 테일러부터 로이 존스 주니어까지. 버나드 홉킨스의 리매치 승률은 언제나 높다. 그것은 그의 현명함에 기인한다. 2차전이 잘 팔리지 않을 것은 명약관화하지만, 2차전이 벌어진다면 나는 경기를 볼 것이다. 나는 그의 마지막 여적이 그림을 완성하는 한 방울이 되도록 신이 허락하길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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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경기를 보는 또 다른 나의 시각도 존재한다. 그것은 자신의 마지막 무덤을 스스로 찾아 들어가는 코끼리처럼, 홉킨스가 스스로 자신의 커리어를 마무리짓기 위해 도슨과의 리매치에 응했다는 시선이다. 홉킨스는 스스로 경기를 거부할 수도 있었다. 커리어를 더 잇기 위해서라면 그 편이 더 나을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는 자신의 마지막이 어디여야만 하는지를 스스로 잘 알고 있어, 도슨과의 리매치에 군말 없이 서명했다.
어쩌면 두 시선 모두 하나의 진실에 대한 두 측면일 수도 있다. 패배가 꼭 오점은 아니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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