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족클럽비판』


*여기에서의 비판은 단지 까대고 씹기 위한 비판이 아니라, 글이 지니는 방향을 비추고 글의 한계점을 논論하는 칸트적 의미의 ‘비판Kritik'이다. 제목만 보고 들어와 이 글을 제멋대로 ’비판‘ 해 주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런 종류의 ‘비판’ 만 제외한다면, 본 글의 방향적 문제나 혹은 사실관계의 오류를 지적하는 코멘트는 언제라도 환영이다.

굳이 이런 선정적인 제목까지 써 가면서, 그리고 그 유명한 칸트의 『비판』-‘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을 오마주hommage해가면서까지 이런 제목을 붙인 이유는, 본인이 칸트만큼 확실하게 인간의 현상적인 학적 인식을 정초할 수 있다는 그런 뜻이 아니라, 칸트가 가지는 이러한 문제의식, 즉 비판(크리틱)이라는 개념을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소설인 『귀족클럽』에 대입하면 어떻게 되는가에 대해 쓴 글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비판Kritik, 즉 크리틱은 한계를 분명하게 한다는 뜻이다. 물론 이 글이 미숙한 본인의 한계를 드러낼 것은 분명할 것이나, 그런 미숙함을 감수하고서라도 본인이 이 글에서 의도하는 것은 이 『귀족클럽』이라는 소설이 어쩔 수 없는 한계점을 가짐을 보이려고 하는 것이다. 즉, 작가 본인이 밝힌 이 글의 목적,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철학을 더 쉽게 전달하고 싶다는 목적과 작가의 글 『귀족클럽』이 취하고 있는 구성이 어쩔 수 없는 모순점을 보이기 때문에 이 글은 한계를 지닌다는 것을 보임이 이 글 『귀족클럽비판』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이 글의 기본적 방향성을 보였으니, 내가 이 글을 비판하기 위한 기본적인 전제들을 언급하겠다. 이 명제들은 내가 생각하는 『귀족클럽』의 한계점을 밝히는 논증에 쓰이게 된다.

1. 전제들.

명제 1. 소설은 ‘개연성 있는 허구’ 이다.

모든 문학 교과서든 비평이든 간에 소설의 가장 기본적 정의는 ‘개연성 있는 허구’ 이다. '허구(fiction)'라는 표현은 작가가 ‘꾸며낸’ 이야기라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개연성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소설은 본질적으로 ‘이야기(story)'이며, 때문에 언제나 인물, 사건, 배경이 존재한다. 이 사건이 전개되는 것을 서술하는 것이 바로 소설이겠으나, 이 사건 전개에 필연성이 없다면 그 전개는 어색한 것이 되어 소설은 개연성이 없어지는 것이다. 개연성(蓋然性)은 말 그대로 ’가능성이 있는‘ ’있을 법한‘ 을 의미한다. 개연성이 있다는 것은 ’있을 법한 이야기‘ 이다. 환상문학 역시도 그 세계관 속에서는, ’있을 법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소설로서의 가치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개연성에 대한 적절한 언급은 움베르트 에코에게서 찾을 수 있을 법하다. 움베르트 에코는 자신의 작품 『장미의 이름』의 시작 배경이 왜 1327년 11월 말에 시작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12월이 되면 체제나의 미켈레는 아비뇽에 가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 그렇다고 해도 11월 초순이나 중순은 좀 이르다. 게다가 나는 수도원의 불목하니들로 하여금 돼지를 잡게 해야 했다. 왜? 이유는 간단하다. 그래야 피 항아리에 시체를 거꾸로 처박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시체가 피 항아리에 거꾸로 처박히는 일이 일어나야 하는가? 그 이유는, 『요한의 묵시록』에 따르면, 두 번째 나팔이 울리면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 나로서는, 『요한의 묵시록』은 기존하는 세계의 일부이기 때문에 바꿀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수많은 질문을 통해서 나는, 당시의 수도원에서는 날씨가 추워지지 않으면 돼지를 잡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11월은 너무 이르다. 그래서 나는 수도원을 산중에다 배치했다. 처음부터 눈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거기에 있다. 이런 고충이 없었더라면 내 이야기의 무대는 폼포사나 콩퀘스 같은 평야지대가 되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언급을 통해 개연성이 무엇인지는 충분히 설명될 것으로 생각된다. 개연성은 소설이 각각이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 상태에서 전개되면 ‘가능성’ 이 있는 것이므로 획득되어지는 것이다.

명제 2. 소설에서의 ‘배경’은 중요하다.

물론 ‘배경’ 이 중요하지 않은 소설들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소설에서 배경은 중요하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따라서 소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이 세계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고, 그것은 특히나 장르 소설에서는 매우 중요하다. 단지 배경만으로도 작품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대여점에서 책을 하나 집어 들었는데, 그 세계관이 전근대 중국이라면 우리는 아마 무협소설일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을 것이며, 새로운 행성이 나오고 우주선이 나온다면 SF소설이라고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엔더의 게임>을 쓴 오슨 스콧 카드는 이런 말을 한다.

“당신은 이야기를 시작한 후 당신의 독자들에게 가능한 한 빨리 그것이 판타지가 될 것인가, SF가 될 것인가를 알려야 한다. 만약 글이 SF고 당신이 그것을 독자들에게 알렸다면, 당신은 엄청난 수고를 던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의 독자들은 이야기에서 보여주는 곳 외에는 알려져 있는 자연법칙이 모두 적용되리라고 가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배경을 통해서 여러 가지를 얻어낼 수 있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에서 ‘무진’ 은 어떤가, 그곳은 안개의 도시이고 주인공의 이상을 상징하며, 또한 편지를 통해 대표된다. 서울과 무진은 뚜렷한 대비를 이루며 그 도식은 편지와 전보라는 도식, 혹은 이상과 현실이라는 도식을 통해 대표된다. 발자크의 『인간희곡』도 마찬가지다. 『인간희곡』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90여개의 소설들은, 그러나 그 수에도 불구하고 하나같이 파리라는 배경을 짙게 드리우고 있으며, 1830년대 파리라는 배경은 자본주의가 발달하고 부르주아 계급이 두드러지면서 각자의 인간 군상들이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라는 양 계급으로 갈라지고 있는* 가장 적나라한 장소**라는 것을 함축한다. 뤼시앵은 그런 부르주아 계급에 편입되고자 하는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아닌가. 우리는 단지 1800년대 파리라는 배경 하나만 가지고서 이 소설의 인물들이 어떻게 행동할지를 예측할 수 있다. 위에 말한 것에서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이 배경은 개연성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배경은 세계관이며, 즉 가능성의 모순율을 설정하는 가장 기본적인 토대이기 때문이다.

명제 3. 철학적 사조는 단지 기존 사조와의 백가쟁명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기존의 사회와 그 사회변화에 대한 반성에서 도출되는 것이다.

이건 특별히 말할 필요가 있을까? 예증해보이기로 하겠다.

맑스의 철학은 자본주의의 발달이 없으면 태어나지 않았다. 맑스는 기본적으로 헤겔의 제자다. 헤겔의 주요 개념은 교양Bildung인데, 이 교양이라는 말은 영어로 culture이며 이 말의 어원은 ‘경작’ 이라는 말이다. 헤겔에게 교양은 인간 인성을 끊임없이 도야해 과는 과정이며 이 도야해 가는 과정이 바로 외화이다. 만일 텍스트가 있다고 하자. 그리고 subject, 빈 그릇으로서 주관이 있다. 이 텍스트는 내가 손에 잡아보기 전까지는 텍스트가 아니고 즉자적인 물(物, thing)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텍스트를 읽는다고 할 때, 그것은 나의 subject에 있는 정신이 텍스트 속으로 들어가는(enter)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텍스트 속을 굴러다니다가 다시 정신에 담겨져 나온다. 이때의 subject는 텍스트를 읽기 전의, 빈 그릇으로서의 subject가 아니다. 텍스트라는 물(thing)이 적재(loading)된, embedding된 정신이다. 따라서, 이때의 정신에는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이 혼합되어 있다. 이것을 외화라고 한다. 또한 인간은 텍스트와는 무관하게 무언가를 계속 경험한다. 그로서 text와 subject가 나선형으로 왔다갔다 하면서 인간의식이 발전한다. 헤겔 변증법의 첫 번째가 바로 이것이다. 이로서 정신은 주체성을 획득한다. 이러한 헤겔의 생각을 가진 맑스에게 자본주의는 발달해가면서 인간의 주체성을 소외(entfremdung)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본주의의 초기 시대에, 자본주의의 미래를 예언하고, 그로서 자신의 철학을 발전시켜 나갔다. 만약 자본주의가 그의 시대에 발달하지 않았다면, 혹은 파리 코뮌이 세워지지 않았다면 그가 과연 그와 같은 철학 사조를 세웠겠는가? 그냥 그 전과 마찬가지의 철학을 발전시켰을 것이다.

이로서 내가 논증하고자 하는 데 필요한 전제를 모두 말했다. 그럼 이제 구체적으로 『귀족클럽』에 내가 말한 전제들을 대입해 보도록 하겠다.

2. 『귀족클럽』의 배경은 어떠한가?

귀족클럽의 배경은 어느 시대일까? 내 생각에는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을 보여주는 르네상스 시대이다. 내가 그 하도많은 시대 중에서 르네상스를 짚어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①신학의 절대성.

『귀족클럽』의 전체적 내용에서 신학은 무척 강한 힘을 발휘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이것은 신이 세계를 지배했던 서구 중세시대의 특징이다. 신권주의(神權主義)에서 인간이 주체로 바뀌는 시기부터 근대라고 칭할 수 있다. 인간이 주체가 되는 것, 그 시작은 코기토(cogito)적인 개인의 탄생이며 그 이행기를 보여주는 시대가 바로 르네상스이다. 르네상스 시대에서부터 근대를 향한 이행이 보여지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르네상스 시대에 근대를 향한 길이 엿보이는가?

②상업이 발달했다.

『귀족클럽』의 세부적 면면을 보면 예이지 대학이 있는 유포리아는 상업이 무척 발달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것은 근대의 특징이다. 고대에서부터 현대까지 보이는 꾸준한 특징은 농업인구가 계속해서 감소되어 왔다는 것이다. 중세만 하더라도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90%를 넘었다. 그러나 지금은 9%밖에 안 된다. 농업생산성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중세에서 르네상스로의 이행 사이에 있는 사건은 바로 흑사병이다. 흑사병은 중세의 농업 인구를 크게 감소시켰고, 이에 농업혁명이라 불리우는 농업생산성의 혁신이 발생하게 된다.

이 농업혁명이 가장 먼저 발생한 곳은 인적 인프라가 가장 잘 갖추어져 있던 이탈리아에서부터였는데, 이탈리아는 이러한 농업혁명으로 인해 농업인구가 크게 감소, 남는 인구가 도시로 모여들게 된다. 그로 인해 상업이 발달하고 도시국가가 생겨나게 된다. 피렌체, 밀라노 등이 르네상스 시기의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도시국가는 기본적으로 상업이 성행했기 때문에, 계약이 언제나 필요했고, 때문에 법률이 발전하고 금융이 발전한다. 최초의 은행이 설립된 곳은 베네치아이다. 상업의 증가가 이러한 필요를 만들어 냈던 것이다. 초기 자본주의의 맹아는 바로 상업이 발달하면서 이러한 금융업이 발전한 도시국가에서 나타난다.

③부르주아의 존재

부르주아는 이러한 도시 시민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본문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는 부르주아라는 계급은 이 소설의 배경이 르네상스라는 나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중세에는 부르주아가 없기 때문이다.

④대학의 존재

대학은 르네상스 시대로의 이행에서 생겨났다. 중세의 지식은 원래 수도원에만 모였다. 그건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기독교의 특징 때문이다. 그런데 기독교의 영향력에서 세계가 벗어나려 애씀에 따라 지식이 모이는 장소가 새로이 생겨나고 그것이 바로 대학이다. 대학 말고도 여러 경로에서 종합적 교양의 궁중 지식인들은 부르주아를 위해 봉사했다.

세 가지 측면으로 미루어 보아 『귀족클럽』의 배경이 되는 시대는 르네상스 시대이다. 개인과 교회가 치열하게 다투는 시대, 인간의 주체성이 태동하는 시대 말이다.

3. 르네상스라는 배경과의 모순.

나는 앞서 명제 1에서 소설은 개연성 있는 허구라고 했다. 그리고 그걸 설명하면서, 있을 법한 이야기, 모순율 없는 이야기가 개연성의 조건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명제 2를 설명하면서, 배경은 개연성과 무척 관련이 깊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이러한 모순율의 가부를 판단하는 가장 기본적인 토대는 이 소설의 세계관, 즉 배경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이제 르네상스라는 이 소설의 배경과 등장인물의 대사가 얼마나 모순됨을 밝힘으로서 이 소설이 갖는 한계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어디 한 번 결을 거슬러서***이 소설을 봐 보도록 하자.

『귀족클럽』제 1화 입학- 팔츠그라프의 적자, 편을 보면 이런 부분이 나온다. 이리나와 교수의 면접 부분이다.

“과거가 본래 어떠한 상태에 있었는가를 지상과제로 삼아야 하며 오직 사실로만 이야기해야 한다는 주장과, 또 모든 역사적 판단의 기초를 이루는 것은 실천적 요구이기 때문에 모든 역사에는 현대의 역사라는 성격이 부과되며 사건은 단지 그 안에서 메아리 칠 뿐이다라는 주장이 있다네. (……) 그렇다면 여기에서 한 가지 물어보지. 이리나 양, 자네는 역사학을 지망한다고 했는데, 자네가 보는 역사가와 역사의 관계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역사상의 사실을 가지지 못한 역사가와 역사가를 가지지 못한 역사상의 사실은 무의미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즉 역사가와 역사상의 사실은 서로 필요한 존재이며 역사란 역사가와 역사상의 사실 사이의 상호작용의 결과이자 과거와 현재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말을 네가 하면 안 된단 말이다. 이 유명한 E. H. Carr의 역사관은 교수의 질문에서 나타나듯이 랑케와 크로체의 사학을 전제한다. 여기에서 랑케에 주목해 보도록 하자. 랑케의 실증사학은 기존의 근대적 역사관들과 대비되는 것이었다.

근대적 역사학의 시작은 볼테르부터이다. 14세기 르네상스와는 400년의 격차가 있는 셈이다. 볼테르 이후로 등장한 사가(史家)들은 미슐레, 칼라일, 드로이젠, 몸젠 등의 낭만주의 사가들이며, 이들은 자신의 주관을 역사에 대입했다. 어느 민족이 더 우월하다느니 그런 것 말이다. 그들의 편향적인 시각에 반기를 들고 나온 것이 랑케의 실증사학이다. 낭만주의 사학의 역사에 대해 도덕적으로 판단하고 미래역사에 대한 예언을 하는 것에 반대해 ‘단순히 일어난 그대로’ 정확하게 서술하는 것이 역사라는 주장을 폈던 것이다.

르네상스의 역사학은 어떨까? 르네상스는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을 보이는 시기였으며 중세의 역사관은 단 하나, 종말이었다. 기독교가 지배하는 세계인 만큼 기독교의 마지막 장의 제목처럼 종말적 예언으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종말을 준비했고, 그 준비를 하면서 1000년이 지났다. 여기에 반대해(이미 종말의 때로 예언된 시기가 지났으므로) 천천히 진보적 역사관이 태어나기 시작하는 때가 바로 이 르네상스란 말이다. 그런데 르네상스의 사관에서, 낭만주의 사관을 넘어서, 실증사학을 넘어서, Carr의 역사관을 말한다고? 이리나는 수백년을 꿰뚫은 천재가 아닐 수 없다. 그걸 이해하는 교수는 또 무언가.

그녀가 단지 올바른 역사적 파악을 했을 뿐이라고 반론할지도 모르겠다. 철학적으로 말해 볼까? 명제 3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모든 사조는 기존의 사회적 상황과 연관되어 일어난다. 실증사학의 랑케는 독일철학의 쉘링을 빼고는 이야기될 수 없다. 그는 셸링의 영향을 깊이 받았고 그 때문에 역사에 나타난 신(神)의 영향을 이애하고 싶어 했다. 랑케는 신은 어디에나 있으며 '위대한 역사적 사건들의 흐름에서' 스스로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성직자이자 역사가가 된 것이기도 했다. 그의 유명한 명언 중의 하나는, "각 시대는 신에 직결되어 있다" 이다.

자 이제 쉘링을 말해 보자, 쉘링은 칸트가 증명하지 않았던(‘않은’ 것이다.) 무한의 문제를 밀어붙인 사람이다. 쉘링에서는 칸트의 구상력이 본래의 한계를 넘어 무한한 능력을 발휘한다. 그것은 철학의 원동력이면서 동시에 예술의 발동기이다. 대상의 실제적 세계인 자연과 관념적 세계는 아무 제한없이 교통한다. 우주는 살아있는 유기체일 뿐만 아니라 일관된 예술작품이기도 하며, 정신의 무의식적, 근원적 시이다. 예술품은 소규모의 우주이고 동일한 정신의 꼭 같은 드러남이며, 단지 의식적으로 창조된 계시일 뿐이다. 이러한 포괄적 동일성이 직접적으로 파악되는 곳은 바로 예술가의 의식이다.

무한자와 유한자의 통일은 헤겔과 쉘링의 공통의 과제였다. 그것이 헤겔에서는 '개념적 파악' 또는 '변증법적-사변적 방법'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철학에서 성취된다면, 쉘링에게는 철학이 예술의 하위에 놓인다. 피테가 정립한 '절대적 자아'가 하나는 예술로 다른 하나는 철학으로 전개되어간 것이다. 이는 근본적으로는 칸트를 넘어서려는 독일 관념론자들의 욕심의 전개과정이므로 칸트에게서 원천을 찾아야 한다.(강유원)

자 이제 쉘링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칸트가 나왔다. 칸트는 무슨 일을 했을까? 그는 체계적으로 ‘신을 죽이기’ 시작했다. 잠깐 강유원의 말을 옮겨보겠다.

“근대철학의 대장은 칸트다. 근대 철학은 주체성subjectivity의 철학, 즉 계몽의 철학인데 그것을 완성한 이가 칸트이기 때문이다. 근대철학의 기본적인 흐름은 신에게서 인간을 독립시키려는 운동이다. 이 계몽주의 프로젝트가 오늘날 21세기에 있어서의 동양과 서양을 갈라놓은 핵심적인 사안이다. (……) 어쨌든 subjectivity가 근대철학에 있어서 핵심적인 것이라면 칸트가 계몽주의 철학을 완성하려다 보니까 남은 문제가 현상지(현상에 관한 인식)와 물자체에 관한 지를 나눌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다. 왜일까? 칸트가 가지고 있는 생각의 전개과정을 고려할 때는 뉴턴을 같이 떠올려야 한다. 철학자 칸트와 물리학자 뉴턴이 같은 방향으로 움직여간 것이다. 칸트가 보기에 근대 자연과학만큼 확실한 학문이 없었다. 즉 근대 자연과학의 성과를 바탕으로 해서 인간의 인식의 확실성을 정초하는 것이야 말로 근대 철학의 핵심과제라 생각했고 그런 과제에 착수한 것이 <<순수이성비판>>이다.”

칸트야말로 가장 신을 제대로 죽인 사람이다. 근대철학을 완성한 칸트가 나오고 나면 신은 나올 자리가 없다. 따라서 지금 신권주의의 시대는 이미 끝나고 교회는 속(俗)에서 손을 떼고 성(聖)으로 후퇴했어야 마땅한 시대인 것이다. 르네상스라는 시대와 모순이 된다.

카를 치자니 랑케가 나왔고, 랑케를 치자니 쉘링이 나왔다. 쉘링을 치기 위해서는 칸트가 필요하다. 칸트를 치면 중세가 무너진다. 세계관에 모순이 생기기 시작한다.

인물만이 연관되어 있을 뿐 철학 전체가 연관되어 있지 않기에 가능하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충분히 연관되어 있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해결하지 않은 무한자의 문제가 있기 때문에 헤겔과 쉴링이 양쪽의 방향으로 움직여 나간 것이며, 그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쉴링이 펼친 철학을 보고 랑케가 경도된 것이다. 결코 연관이 없는 것이 아니다.

혹시 그 종교가 기독교가 아니라고 반론을 할 수도 있기에 미리 말해둔다. 정확히는 ‘종말’의 교리를 가지지 않은 종교라고 말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이 세계관 자체에 균열이 생긴다. 대학이 왜 생겼을까? 지식을 새로운 장소에서 모으기 위해서다. ‘새로운’ 이라는 말은 기존의 것이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기존의 지식을 모으던 장소가 어디일까? 바로 수도원이다. 종말에 대비하기 위해 교회는 지식을 수도원에 모아 보관하고 퍼트리지 않았던 것이다. (『장미의 이름』을 보면 잘 나온다.) 지식이 권력이라는 지식사회학적 관점에서 보면, 교회는 지식을 소유함으로서 자신에게 유리한 권위를 포장할 수 있었고, 권력을 소유할 수 있었다. 이에 반하는 14세기의 움직임이 바로 대학이다. 지식의 유통이 교회를 통해서가 아닌 개인을 통해서 이루어짐으로서 교회로부터의 극복을 꾀했던 것이다. 만약 종말론적 종교가 아니었다면? 로마 시대와 비슷한 문화가 더 발전하지 않았을까? 확실히 말할 수는 없지만 신권주의(神權主義)가 그렇게 쉽게 자리잡히지 않을 것은 분명하다.

또 다른 귀족클럽의 개연성 문제를 들어보자면 데카당스다. 아, 클럽 데카당스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부분은 내 깜냥이 모자라 더 이상 논의를 전개시키기가 힘들다. 내가 말하고 싶은 부분은 랭보의 싯귀에 대한 학생의 반응이다.

“A가 검다고? 지독한 악취 주위에서 윙윙거리며 번쩍거리는 파리들의 털로 뒤덮인 검은 코르셋? 도대체 무슨 말이야? 저 혼자만 이해하는 단어로 시부렁대는 게 시란 말이야? 뭐 이딴 것들이 다 있어?”

“쉽게 설명 드리자면, 그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유의하는 단계로 시작해서 단어들의 환각으로서 자신의 신비한 궤변을 설명하는 단계를 거쳐야만 미(美)와 인사할 줄 아는 단계로 이른다고 말했어요. 이것을 언어의 연금술이라고 하죠. 그러니까 하인리히님 또한 이성의 잣대로 판단하는 관념을 집어던지고 오로지 감각으로 이성을 지배하는, 즉 순수한 감각의 세계로 침잠해 들어간다면 그의 시어를 이해하실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시겠죠. 아, 그는 정말 천재다라고.”

그러니까 네가 그런 반응을 보이면 안 된다는 말이다. 랭보가 속한 프랑스 상징주의는 언제 발흥했는가? 보불전쟁 직후의 피폐된 사회, 그리고 자본주의로 인해 소외되어가는 주체성, 인간은 기계화되어가고 유일한 덕(德)은 자본뿐인 그런 시대에 발흥했다. 아무런 희망도 없는 시대에 나타난 것이 퇴폐주의(데카당스)다. 2차 세계대전 직후에 나타난 전후실존주의나 마찬가지인 사조란 말이다. 르네상스와 같은 풍요로운 시대에는 이러한 문학이 전혀 아무런 공감조차 얻을 수 없을 거란 말이다. 명제 3에서 도출되는 것처럼, 어떤 사조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조가 나타난 사회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들은 너무나도 쉽게, 그들의 문제의식, 그들의 절망, 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은가? 이건 개연성의 문제가 아닌가?

4. 결론.

앞서도 인용한 강유원은 르네상스 시대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어떠한 시대든지 시대정신으로, 집약될 수 있기 마련이지만, 르네상스에 대해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그런 뜻에서 에른스트 카시러는 “한 시대의 철학은 전체 상황이 품고 있는 정신적 본질을 함축하며 다양한 전체상을 포괄하여 결국 단일 초점, 즉 스스로를 인식하는 개념으로 수렴된다는 헤겔의 전제는 초기 르네상스 철학사에는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고 지적한 바 있다. 매우 복잡한 시기였기 때문에 르네상스 시대의 철학 또한 성립되어 있지 않다. 야콥 부르크하르트는 르네상스 문화에 대한 자신의 방대한 저작에서 르네상스 철학에 대해 조금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의 저술에서 그 시대의 철학은 헤겔적 의미에서의 정신의 ‘단일 초점’이나 ‘한 시대의 실체적 정신’으로 대접 받기는 고사하고 당시 사상적 분위기의 한 계기로 조차도 다루어지지 않았다. 온갖 복잡한 일들이 일어난 후 나중에 하나하나 반성해가는 것이 철학이 하는 일일 터인데, 르네상스 시대에는 반성을 할 여유조차 없을 만큼 사회가 끊임없이 빠르고 복잡하게 변화했기 때문이다.“

보기에 밝힌 바와 같이, 르네상스는 이러한 시대였다. 철학이라고 할 만한 것이 존재하지 않고 계속해서 발전해 나갔던 그런 시대. 이런 시대를 배경으로 잡고, 철학적 개념에 대한 논의를 전개해나간다면 언제나 시대착오(Anachrony)****의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결국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비록 철학적 개념들을 소설 상에서 씀으로서 더 쉬운 이해를 도모하는 것은 흥미로운 시도이나, 철학이 언제나 그렇듯이 기존의 사회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나머지, 섣불리 사용하다가는 기존 세계관과의 마찰을 피할 수 없으리라는 점이다. 이것은 『귀족클럽』이 갖는 한계이며 작가가 원하는 바와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이율배반적인 사실이다.

p. s. 이 글의 방향성을 이야기할 좋은 글은 『장미의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에코는 역시 같은 중세적 세계를 다루지만, 이 인물들은 모두 다 철저히 중세적 세계관을 머리에 박고 행동하는 인물들이다. 모순율을 찾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들의 말은 모두 그 당시 중세인의 사고를 뿌리 깊게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p. s. 2. 이 글은 강유원 박사, 『문예비평사전』, 초록불님, 『파리, 모더니티의 수도』의 도움을 받아 작성되었음을 밝힙니다. 무단전재하였으니, 요구하시면 삭제하겠습니다.

주(註)

*『공산당 선언』에서 발췌.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다.

자유민과 노예, 귀족과 평민, 영주와 농노, 동업 조합의 장인과 직인, 요컨대 서로 영원한 적대 관계에 있는 억압자와 피억압자가 때로는 은밀하게, 때로는 공공연하게 끊임없는 투쟁을 벌여 왔다. 그리고 이 투쟁은 항상 사회 전체가 혁명적으로 개조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투쟁하는 계급들이 함께 몰락하는 것으로 끝났다.

예전에는 역사상의 각 시기마다 거의 어디서나 사회가 각종 신분으로 완전히 분열된 상태인 각종 사회적 위계 질서가 발견된다. 고대 로마에는 귀족·기사·평민·노예가 있었고, 중세에는 봉건 영주·가신(家臣)·동업 조합의 장인·직인·농노가 있었으며, 다시 이 계급들 하나하나가 다 특수한 등급들로 나뉘어 있었다.

봉건 사회가 몰락하고 생겨난 현대 부르주아 사회 또한 계급 모순을 폐기하지 못했다. 이 사회는 다만 새로운 계급들, 억압의 새로운 조건들과 투쟁의 새로운 형태들을 낡은 것과 바꿔 놓은 데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 시대, 즉 부르주아지의 시대는 계급 모순을 단순화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사회 전체가 두 개의 적대 진영으로, 즉 서로 대립하는 두 계급인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로 더욱더 분열되고 있는 것이다.“

**『파리, 모더니티의 수도』에서 데이비드 하비가 다루고 있는 1830년대 파리의 묘사.

***결을 거슬러서(Against the grain)

발터 벤야민은 『역사철학에 관한 논고(1940)』제 7장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야만의 기록이 아니면서 동시에 문명의 기록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그러한 기록이 야만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듯이, 자손에게 전이되었던 방식마저 오염된다. 그러므로 역사 유물론자는 가능하면 야만으로부터 관계를 끊는다. 그는 결을 거스르며 역사를 손질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간주한다.” (Benjamin, 1973, 258-9)

“결을 거슬러서”는 읽기(Reading)가 작품(Work)의 자연화(Naturalization)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낯설게 함(Defamiliarization)으로서 숨겨진 사회적 죄의식들과 책임들을 폭로한다. 이 표현은 목수의 일에서 따온 것이다. 목수가 결을 거슬러서 목재를 대패질한다면, 목수는 목재의 부드러운 표면을 분쇄하면서 숨겨진 구조(structure)를 드러낼 것이다.

****시대착오(Anachrony)

발에 따르면(1985),이 용어는 연대기적 일탈이라고 한다. 사건(Event)들이 플롯(plot)이나, 슈제트 속에서 표현되는 순서(order), 그리고 사건들이 이야기(story)나 파뷸라에서 전달되는 순서의 적합성이 부족하면 시대착오라고 부른다.

by 한빈翰彬 | 2008/08/20 21:12 | 트랙백 | 덧글(0)

지금 유서遺書를 쓰며, 주註

지금 유서遺書를 쓰며. 에서 셀프트랙백.

시작 노트의 첫장에
시의 첫문장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1)



고백하자면 나는 그 때 죽어가고 있었다
그날따라 해는 쪼아대었고 죽은 나무에는 쉼터조차 없었으며
귀뚜라미도 위안을 주지 않는
2)
아스팔트에서 피어난 하얀 아지랑이만이 기울이는
붉은 바위 그늘 아래에서3)
우리는 다만 쓸데없는 짓만을 되풀이하며4)

마치 어쩌면 고사하는 가시나무처럼
차가운 수분을 갈구하지만 그 안에는 아무런 힘이 없는
터덜거리지만 그 속에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결국 지배하는 것은 두통과 일사병, 화농, 열점 뿐이었던

작년 오늘과 같은 날짜에
카르타고로 그때 나는 왔다
불타는 도시와 현실감 없는 광기가 용광로처럼 끓어 넘치는 곳으로5)

내 발밑에는 실어증 걸린 그림자가 하나쯤은
함께 있었는지도 모르고 그 그림자의 색깔은
푸른 색이었을지도 모르는
너무나 어두워 부르고 싶은 노래를 들녘에 버리고
한밤에 읊을 시를 실삼나무 끝에 걸어버려
더이상 아무런 및을 남겨 놓지 않는 아주 어두운 군청색과
너무나도 어두워 내 발목을
쐐기풀처럼 감아 끌어당기는 그림자가 있었을지도 모르는
그곳에

고백하자면 나는 그때 죽어가고 있었다

작년, 어느 장소로
나는 오늘과 같은 날짜에 왔다
여름은 아주 위대했다6)
무너져가는 포도에 마지막 달콤함을 달아매었으므로7)
그러나 나는 포도가 아니어서
우리는 다만 쓸데없는 짓만을 되풀이하며8)
오가며 미켈란젤로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9)
쓰러져 가는 나무처럼 중얼거린다
그리고 정말 시간은 있겠지10)

<서두르세요 닫을 시간입니다>11)
여보세요, 대답해요. 당신은 그곳에 있습니까?
아니오 나는 이곳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누구요?
세어보면 당신은 없고 나 하나뿐인데
내가 이 하얀 길을 바라보면
내 옆엔 언제나 또 한 사람이
밤의 망토12)를 휘감고 소리 없이 걷고 있어
두건을 쓰고 있어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하여간 내 곁에 있는 제삼자13)는 누구요?14)
아 내가 지금 대답을 하고 있습니까?
<서두르세요 닫을 시간입니다>

작년
오늘과 같은 날짜에 우리는 만났다
내 그림자는 당신을 만난 뒤로부터 더 짙어졌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보라, 당신의 눈은 진주로 변했다15)
당신의 눈 앞에 그걸 바라본 내가 도리어 부끄러워졌다
그래서 나는 이따금 그대를 보고 놀랐지16)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알지 못하는 까닭은
나와 너의 눈이 늘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었으므로17)

그래서인지 내가 너를 수사(水死)18)한 채로 떠올릴 때마다
언제나 그 눈동자를 떠올리곤 했다
그리고 당신의 눈동자를 떠올리는 언제나
나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당신의 눈을 지워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 진주의 샘은 내 심장을 잘라내고 녹이고 베어 갔으므로
그러나 생각은 남았다

이 움켜잡는 뿌리는 무엇이며
이 생각에서 어떤 흐름이 뻗어 나오는지19)

나는 말하기는커녕 짐작조차 할 수 없다20)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다가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기 때문에21)


하늘로 날아가는 땅과 바닥으로 떨어지는 땅22)
그곳에 나를 부르고, 가게 하고, 남게 하는23)
트럼펫 소리는 검은 빛깔의 고독을 들려준다24)
그 속을 통해 잠깐 동안의 꿈속에서처럼 우리는 미친다
집들은 우리들 뒤에서 쓰러지고
골목마다 비스듬히 기운다
땅들은 물러서며 우리는 그것을 잡는데
우리들은 말馬들이 빗소리처럼 속삭여댄다25)
기억하는가 8월의 긴 눈짓을26)
그대 속에서 돌이 구르고 또 별이 구른다27)
내 몸에 지닌 모든 것만이28)
풍요해지고, 내가 되고29)
나무가 되고30)
하늘로 날아가는 땅과 하늘로 떨어지는 하늘31)

——그러나 어쨌든 당신은 떠났다!

안녕, 안녕
안녕, 부인님들, 안녕, 아름다운 부인님들, 안녕, 안녕.32)


숨쉴 때마다 뜨고 지는 별무리
입술로는 이슬 냄새 젖어오고33)
마지막 잎새의 손가락들이
젖은 둑을 움켜쥐며 가라앉는다34)
밖의 풍경은 내가 없는 듯 늠름히 사라져간다35)
별은 지고 있는데
도대체 밤은 어디에서 시작하는가?36)


그 틈바귀를 통해 당신이 가버린 그곳을 통해
한 줄기 현실이 찢어져버렸다
푸르름, 현실의 푸르름,
현실의 햇빛, 현실의 술37)
나는 현실과 뒤섞인다38)
——그런데 도대체 밤은 어디에서 시작하는가?39)

황혼녘의 시간이 소리죽여 조용한 발걸음으로
저 아래 깊이 지나가고 있다40)
나는 밤을 믿는다41)
내 본질의 어두운 시간들,
내 감각이 깊이 묻어 있는 그 시간들42)
그래, 정말 시간은 있겠지43)
별이 지고 하늘과 땅이 만나며 어둠이 태어날 시간이44)


밤은 마침내 왔다, 탑이 원한을 품은 곳에45)
어둠은 제 몸에 모든 것을 품으며
형상과 불꽃, 짐승과 나, 인간과 권력마저도46)

욕정과 추억을 뒤섞고47)
새를 바람과, 인간을 환상과 뒤섞는다48)
이제 이해되었던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49)

그곳에서 나는 너의 눈을 마주본다
그리고 때문에 나는 너의 삶을 볼 수 있었다.
그곳에는 어떤 트럼펫 소리50)도 들려오지 않았다

트럼펫 소리! 여리고의 트럼펫 소리!51)
슈투카의 급강하 소리!52)
별무리는 언제나 그 주변의 별을 예고한다
어둠의 장막은 찢어졌다53)
하얀 것들이 소리 없이 밤을 가로지른다54)
밤의 종말을 향하여55)
오래된 상처
강의 마른 입술
자작나무의 흰 껍질
죽음 뒤에 나타나는 흰 터널56)
외로운 영혼
어린 시절의 기억
물 위에 뜬 빛
하얀 새의 넋57)58)
진주의 샘은 사라졌다
그리고 마침내 밤의 죽음이 선고된다;
모든 것은 새벽의 빛깔을 띄고 있다59)
밤은 마침내 살해되었다 오늘이 왔으므로
오늘은 왔다60)

지금 이곳엔 물이 없고 다만 바위뿐
바위 있고 물은 없고 모랫길뿐
길은 구불구불 산들 사이로 오르고
산들은 물이 없는 바위산
물이 있다면 발을 멈추고 목을 축일 것을
바위 틈에서는 멈출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다
땀은 마르고 발은 모래 속에 파묻힌다
바위 틈에 물만 있다면
침도 못 뱉는 썩은 이빨의 죽은 산 아가리
여기서는 설 수도 누울 수도 앉을 수도 없다
산 속엔 정적마저 없다
비를 품지 않은 메마른 불모의 천둥이 있을 뿐
산 속엔 고독마저 없다
금간 흙벽집들 문에서
시뻘겋게 성난 얼굴들이 비웃으며 우르렁댈 뿐

만일 물이 있고


바위가 없다면
만일 바위가 있고
물도 있다면

샘물
바위 사이에 물웅덩이
다만 물소리라도 있다면
매미 소리도 아니고
마른 풀잎 소리도 아닌
바위 위로 흐르는 물소리가 있다면
티티새가 소나무 숲에서 노래하는 곳
뚝뚝 똑똑 뚝뚝 또르륵 또로록
하지만 물이 없다61)


오늘 어느 날에
나는 그곳으로 왔다62)
나를 부르고, 가게 하고, 남게 하는63)
심지어는 묵시록의 나팔 소리64)마저 들려오지 않는,
때문에 내 목소리가 그대에겐 잘 들릴 것이다

나라고 해서 좋아서 한 일은 아니었다. 나는 나의 삶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고 그러는 사이에 우리의 운명은 빗나가고 말았다. 이제 나는 너를 부르노라. 우리 사이에 놓여 있던 수많은 세월의 자격으로 너를 부르노라.65)

샨티 샨티 샨티66)



주註.

 1)
다음 문장은 적게는 한 곳, 많게는 두 곳에서 인용한 것이다. 일단 전체 문장은 류시화의 <사랑과 슬픔의 만다라>에서 인용한 것이다. 시작 노트의 첫장에/시의 첫문장에/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이다. 그리도 두번째는 엘뤼아르(P. Eluard)의 <자유(Liberte)>의 18연 4행으로부터 옮긴 것으로 원문은 Je'cris ton nom(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이다. 그리고 아울러 비록 본문에는 류시화의 것을 전문 인용했지만, 본인은 이 시 '자유' 에서, 마지막 연에 더 큰 인상을 받았음을 밝혀둔다. 그 부분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되찾은 건강 위에/사라진 위험 위에/
회상없는 희망 위에/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그 한마디 말의 힘으로/나는 내 삶을 다시 시작한다/
나는 태어났다 너를 알기 위해서/
너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자유여 

 2)
엘리엇(T.S.Eliot)의 <황무지(The Waste Land)>의 1장인 죽은 자의 매장(The Burial Of The Dead)의 2연 4행-5행 그곳엔 해가 쪼아대고/죽은 나무에는 쉼터도 없고/귀뚜라미도 위안을 주지 않고/ 그리고 이 부분은 엘리엇 자신이 성경에서 인용했다고 밝힌 부분이기도 하다. <전도서> 12:05, 노년의 적막을 말하는 곳, <그런 자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할 것이며 길에서는 놀랄 것이며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 원욕이 그치리니> 엘리엇의 원주.

 3)
<이사야> 32장 3절, <의로운 왕은 광풍이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우는 곳 같을 것이며 마른 땅에 냇물 같을 것이며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으리라> 이곳에서의 바위는 물과 대비되는 불모의 존재이며, 생산 없는 성(性)을, 황폐함을 상징하는 존재이다. 붉은 사막의 이미지로도 차용했음을 밝힌다.

 4)
릴케(R.M.Rilke)의 <천사에게>의 4연 4행, <우리는 다만 쓸데없는 짓만을 되풀이하네(und wir sind am Kleinlichsten)>무의미한 느낌이 맘에 들었음을 밝혀둔다.

 5)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3부 1장, <카르타고로 그때 나는 왔다. 한 가마의 사악한 사랑이 내 귓전에서 온통 끓어 대는 곳으로> 금욕주의자의 성인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이 원한 바는 아니겠지만 불모의 성으로 생각했다. 그는 금욕주의자다.

 6)
R.M.Rilke, <가을날(Hersttag)>, 1연 1행. <주여, 시간이 되었습니다. 여름은 아주 위대했습니다.>

 7)
같은 시, 2연 3행, <무거워지는 포도에 마지막 달콤함을 넣어주소서>

 8)
주석4 참고

 9)
T.S.Eliot, <프루프록의 사랑 노래(The Love Song Of J. Alfred Prufrock)>의 2연, <방에서는 여자들이 오가며/미켈란젤로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무의미한 생활상들을 이야기하고 있음

 10)
같은 시, 4연. <그리고 정말 시간은 있겠지> 그리고 이것은 Andrew Marrell의 시행에서 엘리엇이 변형해 따온 것이다.

 11)
엘리엇(T.S.Eliot)의 <황무지(The Waste Land)>, 2장 체스 게임. <서두르세요 닫을 시간입니다> 바텐더가 문닫을 시간을 알리는 말, 여기에서는 바로 위에 시행의 언명에 대한 부정이기도 하다.

 12)
여기에서의 '밤의 망토' 는 내가 마음대로 원시에서 변형시킨 것인데 그 이미지 자체는 로저 젤라즈니의 <신들의 사회>에서 밤의 여신 라트리를 묘사하는 부분에서 착안했음을 밝혀둔다.

 13)
나, 그리고 이 시를 보고 있는 당신 외의 또 한 사람

 14)
엘리엇(T.S.Eliot)의 <황무지(The Waste Land)>의 누가복음 2장 13-31절의 예수와 함께 엠마우스로 가는 여행의 묘사 부분.

 15)
엘리엇(T.S.Eliot)의 <황무지(The Waste Land)>, 1부 <죽은 자의 매장>, 태롯 카드의 예언 부분, <여기 당신의 패가 있어요. 익사한 페니키아 수부군요./ 보세요, 그의 눈은 진주로 변했어요.> 바다의 놀라운 생명력을 설명하는 부분이면서 동시에 대상의 눈을 진주로 표현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바다가 성을 상징한다는 점(황금가지)를 참고하라.

 16)
릴케(R.M.Rilke), <위대한 밤(DIE GROSSE NACHT)>의 첫행, <이따금 나는 그대를 보고 놀랐지, 어제부터>

 17)
엘뤼아르(P. Eluard), <네 눈의 곡선이……>에서 인용, 1연의 4-5행, <네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알지 못하는 까닭은/나와 너의 눈이 늘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지>

 18)
수사(水死)는 익사를 표현하는 말이면서 동시에 엘리엇의 <황무지>의 4부의 제목이기도 하다. 페니키아 수부의 익사를 표현하는 그 유명한 부분은, 생산의 성을 상징하는 바다에 어부왕이 바쳐지는 과정이면서 결국 새로운 성을 생산해내려는 제사 의식의 한 변형이다.  

 19)
엘리엇(T.S.Eliot)의 <황무지(The Waste Land)>, 1부 <죽은 자의 매장> 2연 1행, <이 움켜잡는 뿌리는 무엇이며/이 자갈더미에서 무슨 가지가 자라 나오는가?> 

 20)
같은 부분의 3행, <인자여, 너는 말하기는커녕 집작도 못하리라.>

 21)
로저 젤라즈니, <신들의 사회>에서 정각자 샘이 란프류, 즉 흑의의 왕 니르니티의 죽음에 추도사를 하는 부분을 인용한 것이다.

 22)
릴케(R.M.Rilke), <저녁(ABEND)>의 1연에서 인용
<밤이 되면서 서서히/고목의 한 가장자리에 깃든 옷 빛깔이 바뀌어가며
그대 보듯이 그대로부터 땅은 떠나가네/하늘로 날아가는 땅과 바닥으로 떨어지는 땅>

 23)
릴케(R.M.Rilke), <이별(ABSCHIED)>의 2번째 연,
<어떻게 아무 방어 없이 나는/그곳에 나를 부르고, 가게 하고, 남게 하는/그것을 쳐다볼 수 있었던가>

 24)
릴케(R.M.Rilke)의 <소년(DER KNABE)>의 뒷부분 행.
<누군가 내 곁에 서서 트럼펫으로/반짝이는 빛 찢어지는 소리를 공기에 불어댄다/
트럼펫 소리는 검은 빛깔의 고독을 울려준다>

본문에서는 뒤엣 행과 이어지는 의미로서 쓴 것이기도 하고, 고독을 울린다는 느낌이 맘에 들어서이기도 하다.

 25)
릴케(R.M.Rilke)의 같은 시,
<그 속을 통해 잠깐 동안의 꿈속에서처럼 우리는 미친다/
집들은 우리들 뒤에서 쓰러지고/골목마다 비스듬히 기운다/
땅들은 물러서며 우리는 그것을 잡는데/우리들은 말(馬)들이 빗소리처럼 속삭여댄다>

 26)
가르시아 료르까, <기억하는가 8월의 긴 눈짓을>

 27)
릴케(R.M.Rilke), <저녁(ABEND)>, <그대 속에서 돌이 구르고, 또 별이 구른다>

 28)
릴케(R.M.Rilke)의 <시인(DER DICHTER)>의 마지막에서 두번째 행, <내 몸에 지닌 모든 것만이>

 29)
릴케(R.M.Rilke)의 <시인(DER DICHTER)>의 마지막 행<내 몸에 지닌 모든 것만이/ 풍요해지고, 내가 되고>

 30)
황지우, <겨울-나무에서 봄-나무에로>의 마지막 부분, <나무가 되고/나무는 스스로 나무이다>

 31)
주석 22 참조.

 32)
셰익스피어, <햄릿> 4막 5장, 오필리어가 수사(水死)하기 전에 하는 인사말. 
 
 33)
릴케(R.M.Rilke)의 <정적(DIE STILLE)>에서 인용.

 34)
엘리엇(T.S.Eliot)의 <황무지(The Waste Land)>, 3부 불의 설교의 1행 뒷부분, <마지막 잎새의 손가락들이/젖은 둑을 움켜쥐며 가라앉는다.> 이것은 하강의 이미지이며, 동시에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35)
릴케(R.M.Rilke)의 <위대한 밤(DIE GROSSE NACHT)>의 초반부에서 인용.
<아직도 새 도시는/거절하듯 내게 완강했으며, 밖의 풍경은/마치 내가 이 세상에 없는 듯 늠름히 사라져갔지>

 36)
릴케(R.M.Rilke), <사랑에 빠져 있는 여인(DIE LIEBENDE)>, 1연 4행 <대관절 밤은 어디에서 시작하는지?(UND WO BEGINNT DIE NACHT?)>를 조금 변형한 구절.

 37)
릴케(R.M.Rilke) <죽음의 체험(TODES-ERFAHRUNG)>에서 인용

 38)
릴케(R.M.Rilke), <LE MIROIR DUN MOMENT>에서 인용<새는 바람과 뒤섞이고/하늘은 진리와/사람은 현실과 뒤섞인다>

 39)
주석 36 참고

 40)
릴케(R.M.Rilke)의 <낡은 집에서(IM ALTEN HAUSE)>에서 인용, 1연의 3-4행.
<황혼녘의 시간이 소리죽여 조용한 발걸음으로/저 아래 깊이 지나가고 있다>

 41)
릴케(R.M.Rilke), <그대 어둠이여(DU DUNKELHEIT)>의 마지막 행. <나는 밤을 믿습니다.>

 42)
릴케(R.M.Rilke)의 <어두운 시간들(ICH LIEBE MEINES WESENS DUNKELSTUNDEN)>의 첫행,
<내 본질의 어두운 시간을 나는,/내 감각이 깊이 묻어 있는 그 시간을 사랑하네/>

 43)
주석 10 참조.

 44)
주석 31,36,39 참조

 45)
릴케(R.M.Rilke), <위대한 밤(DIE GROSSE NACHT)>의 후반부. <탑이 원한을 품은 곳에/어긋난 운명의 도시가 내 주위를 싸고 도는 곳에>

 46)
릴케(R.M.Rilke), <그대 어둠이여(DU DUNKELHEIT)>의 중반부의 어둠에 대한 설명, <그러나 어둠은 제 몸에 모든 것을 품고 있네/형상과 불꽃, 짐승과 나/인간과 권력도/어둠은 붙잡고 있네->

 47)
엘리엇(T.S.Eliot)의 <황무지(The Waste Land)>, 1부 <죽은 자의 매장>의 3행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이 부분은 고의적으로 도치했음을 밝혀둔다.

 48)
릴케(R.M.Rilke), <LE MIROIR DUN MOMENT>에서 재인용,
<이해되었던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새는 바람과 뒤섞이고/하늘은 진리와/사람은 현실과 뒤섞인다>
본문에서는 현실을 환상으로 바꾸었는데 그것은 어둠의 이미지를 고려한 것이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많은 환상을 본다. 그것은 밤도 마찬가지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그렇게 바라고 있는 어둠은 환상의 대상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이지만 동시에 거짓이기도 한 것이다.

 49)
주석 48 참조

 50)
고독의 트럼펫 소리를 의미한다.

 51)
<여호수아>의 여리고 성을 무너트리는 7일째의 나팔 소리.

 52)
여러 2차 세계대전에 관련된 체험 수기나 글들을 보면 독일군의 폭격기 슈투가에 대해 이런 증언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슈투카가 폭격을 위해 급강하를 할 때, 그들의 날개에서는 기이한 나팔 소리가 났다. 그것은 그 폭격기를 맞대응해야 했던 보병 부대에게 공포의 소리였으며 묵시록의 나팔 소리로 통했다." 본문에서는 <전격전의 전설>에서 인용했다.

 53)
엘리엇(T.S.Eliot)의 <황무지(The Waste Land)>, 3부 불의 설교의 1행 첫부분, <강의 천막은 찢어졌다> 이 부분에 대한 황동규의 해설은 다음과 같다.
"시각이 주는 이미지만을 생각한다면 천막처럼 위를 덮고 있던 나뭇잎이 가을에 졌다는 뜻임. 그러나 구약성경에 의하면 유목민인 유태인이 천막을 성소로 사용했으므로 성소가 무너졌다는 뜻이 될 수도 있음. 또는 일반적으로 여자의 순결이 깨졌음을 의미할 수도 있음."
본문에서는 '강의 천막'을 '어둠의 장막'이라는 시어로 변형시켰다. 그것은 밤을 표현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그리고 굳이 이 원주를 밝힌 이유는 가을이 되었음을 이 원주를 통해서 밝히고 싶기도 하기 때문이다.

 54)
엘리엇(T.S.Eliot)의 <황무지(The Waste Land)>, 3부 불의 설교 3행, <바람은 소리 없이 갈색 땅을 가로지른다> 이것은 시각적 이미지를 차용하기 위해 그냥 옮겨 왔음을 밝혀둔다.

 55)
엘뤼아르(P. Eluard), <그대가 없다면>에서 인용,
<아랫마을 포도밭에도/땅 위에도 추위는 가혹해지며
불면도 없고/낮에 대한 회상도 없는 밤에/
불길한 경이의 사건이/모든 것에, 모든 사람들에게
한 겹도 두 겹도 아닌 죽음을 베푼다/밤의 종말을 향하여>

 56)
죽은 뒤에 나타나는 바르도를 일컫는다.

 57)
이 부분은 이중인용이다. 이 부분은 박두진의 <변증법>에서 인용한 것으로, 원래 인용문에서는 '날개' 라는 시어였다. 박두진의 그 시를 보면 이렇게 되어 있다.
<날개였었지/날개였었지/높디높은 하늘 벽을 위로 부딪쳐/그 울음 혈맥 고운 하얀 새의 넋>
 
 58)
류시화의 <하얀 것들>에서 인용.
오래된 상처/강의 마른 입술/
자작나무의 흰 껍질/죽음 뒤에 나타나는 빛의 터널/
외로운 영혼/어린시절의 기억/
물 위에 뜬 빛/ 날개

 59)
엘뤼아르(P. Eluard)의 <불사조>에서의 마지막 행. <모든 것은 새벽의 빛깔을 띄고 있다> 밤의 죽음을 선고하는 부분.

 60)
로저 젤라즈니, <신들의 사회> 야마와 칼리의 결혼식 부분. <그들은 왔다>

 61)
이 부분은 가장 긴 인용으로, 엘리엇(T.S.Eliot)의 <황무지(The Waste Land)>, 5부 <천둥이 한 말>의 첫부분이다. 바위와 물의 대비를 극명하게 나타내는 부분으로서, 물(생성)은 없고 바위뿐인 불모만이 가득함을 밝히고 있다.

 62)
주석 5 참조.

 63)
주석 23 참조.

 64)
<요한계시록>에 보면 천사가 인을 떼고 나팔을 부는 장면이 나온다. 그것은 종말의 때가 임박했음을 천사가 말하는 것인데, 여기에서는 이제 때가 임박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65)
Mark Northgeritte의 글,
<나라고 해서 좋아서 한 일은 아니었다. 나는 나의 살밍 무너져 내리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고 그러는 사이에 우리의 운명은 빗나가고 말았다. 이제 나는 너를 부르노라. 우리 사이에 놓여 있던 수없는 세월의 자격으로 너를 부르노라.>

 66)
우파니샤드의 형식적인 결여로 사용되는 말로서 <이해를 초월한 평화> 라는 뜻이다. 시를 끝낸다는 의미로 차용하기도 했고, 이해를 초월한다는 말이 원래 싯구와 얽히기 때문에 쓰기도 했다. 원래 원음 발음은 솬티 솬티 솬티에 더 가까우나, 표기상의 부드러움을 고려하여 샨티 샨티 샨티를 표기했음을 말해둔다.

 柱 終.

by 한빈翰彬 | 2008/07/23 21:58 | | 트랙백 | 덧글(0)

지금 유서遺書를 쓰며.



 

시작 노트의 첫장에
시의 첫문장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고백하자면 나는 그 때 죽어가고 있었다
그날따라 해는 쪼아대었고 죽은 나무에는 쉼터조차 없었으며
귀뚜라미도 위안을 주지 않는
아스팔트에서 피어난 하얀 아지랑이만이 기울이는
붉은 바위 그늘 아래에서
우리는 다만 쓸데없는 짓만을 되풀이하며
마치 어쩌면 고사하는 가시나무처럼
차가운 수분을 갈구하지만 그 안에는 아무런 힘이 없는
터덜거리지만 그 속에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결국 지배하는 것은 두통과 일사병, 화농, 열점 뿐이었던

작년 오늘과 같은 날짜에
카르타고로 그때 나는 왔다
불타는 도시와 현실감 없는 광기가 용광로처럼 끓어 넘치는 곳으로
내 발밑에는 실어증 걸린 그림자가 하나쯤은
함께 있었는지도 모르고 그 그림자의 색깔은
푸른 색이었을지도 모르는
너무나 어두워 부르고 싶은 노래를 들녘에 버리고
한밤에 읊을 시를 실삼나무 끝에 걸어버려
더이상 아무런 및을 남겨 놓지 않는 아주 어두운 군청색과
너무나도 어두워 내 발목을
쐐기풀처럼 감아 끌어당기는 그림자가 있었을지도 모르는
그곳에

고백하자면 나는 그때 죽어가고 있었다

작년, 어느 장소로
나는 오늘과 같은 날짜에 왔다
여름은 아주 위대했다
무너져가는 포도에 마지막 달콤함을 달아매었으므로
그러나 나는 포도가 아니어서
우리는 다만 쓸데없는 짓만을 되풀이하며
오가며 미켈란젤로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쓰러져 가는 나무처럼 중얼거린다
그리고 정말 시간은 있겠지

<서두르세요 닫을 시간입니다>
여보세요, 대답해요. 당신은 그곳에 있습니까?
아니오 나는 이곳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누구요?
세어보면 당신은 없고 나 하나뿐인데
내가 이 하얀 길을 바라보면
내 옆엔 언제나 또 한 사람이
밤의 망토를 휘감고 소리 없이 걷고 있어
두건을 쓰고 있어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하여간 내 곁에 있는 제삼자는 누구요?
아 내가 지금 대답을 하고 있습니까?
<서두르세요 닫을 시간입니다>

작년
오늘과 같은 날짜에 우리는 만났다
내 그림자는 당신을 만난 뒤로부터 더 짙어졌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보라, 당신의 눈은 진주로 변했다
당신의 눈 앞에 그걸 바라본 내가 도리어 부끄러워졌다
그래서 나는 이따금 그대를 보고 놀랐지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알지 못하는 까닭은
나와 너의 눈이 늘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었으므로

그래서인지 내가 너를 수사(水死)한 채로 떠올릴 때마다
언제나 그 눈동자를 떠올리곤 했다
그리고 당신의 눈동자를 떠올리는 언제나
나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당신의 눈을 지워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 진주의 샘은 내 심장을 잘라내고 녹이고 베어 갔으므로
그러나 생각은 남았다

이 움켜잡는 뿌리는 무엇이며
이 생각에서 어떤 흐름이 뻗어 나오는지
나는 말하기는커녕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다가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기 때문에

하늘로 날아가는 땅과 바닥으로 떨어지는 땅
그곳에 나를 부르고, 가게 하고, 남게 하는
트럼펫 소리는 검은 빛깔의 고독을 들려준다
그 속을 통해 잠깐 동안의 꿈속에서처럼 우리는 미친다
집들은 우리들 뒤에서 쓰러지고
골목마다 비스듬히 기운다
땅들은 물러서며 우리는 그것을 잡는데
우리들은 말馬들이 빗소리처럼 속삭여댄다
기억하는가 8월의 긴 눈짓을
그대 속에서 돌이 구르고 또 별이 구른다
내 몸에 지닌 모든 것만이
풍요해지고, 내가 되고
나무가 되고
하늘로 날아가는 땅과 하늘로 떨어지는 하늘
——그러나 어쨌든 당신은 떠났다!

안녕, 안녕
안녕, 부인님들, 안녕, 아름다운 부인님들, 안녕, 안녕

숨쉴 때마다 뜨고 지는 별무리
입술로는 이슬 냄새 젖어오고
마지막 잎새의 손가락들이
젖은 둑을 움켜쥐며 가라앉는다
밖의 풍경은 내가 없는 듯 늠름히 사라져간다
별은 지고 있는데
도대체 밤은 어디에서 시작하는가?

그 틈바귀를 통해 당신이 가버린 그곳을 통해
한 줄기 현실이 찢어져버렸다
푸르름, 현실의 푸르름,
현실의 햇빛, 현실의 술
나는 현실과 뒤섞인다
——그런데 도대체 밤은 어디에서 시작하는가?

황혼녘의 시간이 소리죽여 조용한 발걸음으로
저 아래 깊이 지나가고 있다
나는 밤을 믿는다
내 본질의 어두운 시간들,
내 감각이 깊이 묻어 있는 그 시간들
그래, 정말 시간은 있겠지
별이 지고 하늘과 땅이 만나며 어둠이 태어날 시간이

밤은 마침내 왔다, 탑이 원한을 품은 곳에
어둠은 제 몸에 모든 것을 품으며
형상과 불꽃, 짐승과 나, 인간과 권력마저도
욕정과 추억을 뒤섞고
새를 바람과, 인간을 환상과 뒤섞는다
이제 이해되었던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곳에서 나는 너의 눈을 마주본다
그리고 때문에 나는 너의 삶을 볼 수 있었다.
그곳에는 어떤 트럼펫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트럼펫 소리! 여리고의 트럼펫 소리!
슈투카의 급강하 소리!
별무리는 언제나 그 주변의 별을 예고한다
어둠의 장막은 찢어졌다
하얀 것들이 소리 없이 밤을 가로지른다
밤의 종말을 향하여
오래된 상처
강의 마른 입술
자작나무의 흰 껍질
죽음 뒤에 나타나는 흰 터널
외로운 영혼
어린 시절의 기억
물 위에 뜬 빛
하얀 새의 넋
진주의 샘은 사라졌다
그리고 마침내 밤의 죽음이 선고된다;
모든 것은 새벽의 빛깔을 띄고 있다
밤은 마침내 살해되었다 오늘이 왔으므로
오늘은 왔다

지금 이곳엔 물이 없고 다만 바위뿐
바위 있고 물은 없고 모랫길뿐
길은 구불구불 산들 사이로 오르고
산들은 물이 없는 바위산
물이 있다면 발을 멈추고 목을 축일 것을
바위 틈에서는 멈출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다
땀은 마르고 발은 모래 속에 파묻힌다
바위 틈에 물만 있다면
침도 못 뱉는 썩은 이빨의 죽은 산 아가리
여기서는 설 수도 누울 수도 앉을 수도 없다
산 속엔 정적마저 없다
비를 품지 않은 메마른 불모의 천둥이 있을 뿐
산 속엔 고독마저 없다
금간 흙벽집들 문에서
시뻘겋게 성난 얼굴들이 비웃으며 우르렁댈 뿐

만일 물이 있고


바위가 없다면
만일 바위가 있고
물도 있다면

샘물
바위 사이에 물웅덩이
다만 물소리라도 있다면
매미 소리도 아니고
마른 풀잎 소리도 아닌
바위 위로 흐르는 물소리가 있다면
티티새가 소나무 숲에서 노래하는 곳
뚝뚝 똑똑 뚝뚝 또르륵 또로록
하지만 물이 없다

오늘 어느 날에
나는 그곳으로 왔다
나를 부르고, 가게 하고, 남게 하는
심지어는 묵시록의 나팔 소리마저 들려오지 않는,
때문에 내 목소리가 그대에겐 잘 들릴 것이다

나라고 해서 좋아서 한 일은 아니었다. 나는 나의 삶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고 그러는 사이에 우리의 운명은 빗나가고 말았다. 이제 나는 너를 부르노라. 우리 사이에 놓여 있던 수많은 세월의 자격으로 너를 부르노라.

샨티 샨티 샨티


***

사실 이 시는 90% 이상이 다른 시에서 따 온 인용문입니다. 인용출처는 나중에 다른 포스트로 하겠습니다.

by 한빈翰彬 | 2008/07/17 17:35 | | 트랙백(1) | 덧글(0)

윤길현 사태에 대한 촌평.


이젠 너무 뒷이야기가 되어버린 듯한 윤길현 사태이지만, 그래도 한번쯤은 해 보고 싶은 이야기였기에 적는다.

(그때는 시간도 없었고, 충분한 자료도 없어서 뭐라고 하기 무서웠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기엔, SK의 윤길현 사태를 한 마디로 말해보자면,


SK가 싸움할 때를 놓쳤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 SK와 기아의 3연전 동안 SK는 사사구를 9개, 기아는 2개를 맞았다. 물론 그 외에도 위협구는 셀 수 없다. 박재홍이 위협구를 피하다가 자빠지기도 하고, 김재현이 화난 표정으로 투수 쪽을 바라보며 몇 발자국 걷기도 하고 그랬으니까 말이다.

(위협구 동영상도 찾다보면 나올 것이다. 물론 묻혀 버렸지만.)


나는 지금 SK가 그런 사태를 벌였던 것이 정당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렇다고 기아를 옹호하려는 것도 아니다.

단지 나는 지금 그 때의 양팀 분위기가 상당히 좋지 않았었고, 언제라도 싸움이 일어났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경기였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기아의 응원단장 사태도 겹쳐 있었다는 것을 굳이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너무 황당한 사건이라서.)


이번 윤길현 사태에서 가장 큰 힘은 물론 여론의 힘이었다. 결국 양팀이 분쟁을 벌인다면, 여론이 어느 쪽을 바라보는가에 따라 누가 뭇매를 맞는지가 결정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SK는 참으로 좋지 않은 식으로 싸움을 시작했다. 사사구를 맞추고도 타자에게 강짜를 부리는 모습이나 그것이 특히 선배에게 대드는 후배의 모습이었다는 것은 보편적인 한국인의 정서상으로 볼 때 용납되기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삼진을 잡은 후 그 동작을 낄낄대며 비웃은 것은 우리 모두의 화를 북돋기 충분했다.


여론은 단숨에 SK에게 불리한 쪽으로 휘몰아쳤고, 윤길현은 묵사발이 되었다. 일단 싸움을 시작한 것이 그런 타이밍이었으니 당연
히 SK는 전투를 잘못 시작한 것에 대해 후폭풍을 맞을 수밖엔 없었고, 결국 패배했다는 이야기다.

내가 SK였다면…………



일단 김재현 같은 과거 LG의 올드비들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킬 것 같은 선수가 맞았을 때, 그가 화를 내며 벤치클리어링을 시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론은 왜 그가 이런 식으로 싸움을 벌였는지에 대해 추적을 시도할 것이고 그렇다면 SK는 여론에서 상당히 유리한 위치를 선점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클라우제비츠나, 혹은 손자(孫子)나, 전쟁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세 가지를 이야기한다. 상대를 이기기 위해서는 내가 원하는 때에, 내가 원하는 곳에서, 상대보다 많은 병력을 동원하면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시간(時間)이 상대보다 많은 병력(여론)을 움직이는 힘으로 작용하였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by 한빈翰彬 | 2008/07/08 21:04 | 야구이야기 | 트랙백 | 덧글(2)

6月 8日


 창 밖의 햇살이 따스하다. 낮잠을 자다 일어났는데 환기할 겸 열어놓았던 창문을 통해 밝은 햇살이 나를 감싸고 있었다. 그 포근한 맛에 취해 이 순간이 앞으로 영원했으면 싶었다. 새삼 내가 살고 있는 이 순간에 감사했다. 사실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지금 현재 지니고 있는 것에 감사하는 것이다.
 이 이치를 깨달은 것은 우습지만 혓바늘 때문이었다. 어렸을 땐 혓바늘이 한 번 돋았다 하면 아프다 울상이고, 밥도 안 먹기가 일쑤였다. 그래서 아픈 혀를 내밀고서 끙끙거리며, 혓바늘이 돋지 않았을 때의 그 느낌을 떠올리며 뒹굴거리곤 했다. 이게 다 나으면 안 아프다는 것에 감사해야지. 그렇게 생각하다가 혓바늘이 사라지면 그런 생각을 떠올렸던 것도 잊어버리고 음식부터 허겁지겁 집어먹기만 했다.
 그러던 것도 여러 번, 언젠가 밥을 먹다가 문득 혓바늘 생각이 났다. 그래, 지금은 아프지 않잖아. 이 순간에 감사하자. 그리고 나는 그때부턴가 혀가 아프지 않고 밥을 먹는다는 것이 조금쯤은 더 행복해졌다.
 지금 가지고 있는 당연한 것에 감사하라. 우리는 언제나 우리에게 부재하는 것만을 그리워한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나중에 그리워하는 일이 없도록 지금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것에 감사하라. 나는 2시 20분이면 언제나, 공부하지 않고 쇼파에 누워 낮잠을 잤던 유치원 때를 그리워하지만 지금 나에게 벌어지고 있는 이 2시 20분의 공부라는 현실에 대해 그것을 부정하고, 지옥같다고 느끼지 않는다. 내가 가지고 있는 또다른 한때에 대해 즐거워하며 그것을 누리고자 한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고자 한다. 기독교를 믿지는 않지만,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은 얼마나 소중한 말인가.
 나는 비록 지금 잠조차 제대로 자지 못하는 힘든 생활을 보내고 있지만, 지금이야말로 모든 시간을 전부 공부하는 데 순수하게 쏟아부을 수 있고, 누님들처럼 옷을 고르느라 시간을 지체하지 않아도 되며, 어머니처럼 우리에게 무엇을 먹일까에 대해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 돈에 대해 마음을 쓰지 않아도 되고, 취업에 대해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그날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 

by 한빈翰彬 | 2008/07/08 19:43 | 일기장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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